종합書論

서예란 무엇인가?/서법 예술

한문서예 이론/書論

서예란 무엇인가?/서법 예술

동양 3국이 주도하는 서법예술로서 우리가 흔히 서예라 부리는 기예는 한자를 사용하여 글씨를 예술적 방법, 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중국은 흔히 서학, 또는 서법(書法)이라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는 명칭에 이의 없이 받아들여져 사용되며 불리우고 있다.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는 이름으로 글씨를 쓰는 고유하고 독특한 예술적 양식이 존재한다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한글이나 국한 혼용의 서예술이나 마찬가지 개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의 문자를 예술로 어느 정도는 응용한 경우가 있지만, 한자처럼 글씨를 쓰는 문화가 광범위하고 엄격하게 이론으로 정립하여 적용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법은 한자 문화권을 대변하는 독특한 문화로 인식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이 주도하고 다른 동남아시아나 구미 여러 나라에서 동양 3국의 교포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는 실태다. 

서법을 ‘글씨를 쓰는 법’ 정도로 풀이한다면 이는 우리식의 표현이다. 서법은 ‘글씨 쓰는 법 속에 포함된 모든 예술적 집약된 행위’를 말한다. 특히 비각에 나타난 서법은 한자의 기원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체의 다양한 변화와 발전에 부합하는 풍부한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글씨는 인격을 나타낸다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철학적 소양이 꾸준하게 작용하여 역대로 서법은 빼놓을 수 없는 교양학습의 항목이 되었으니 이는 종주인 중국이나 조선이나 동일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문화적 소양으로 인식되는 서법은 단지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로 예술적 행위로만은 치부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계 미치는 심오한 영향력을 중시하는 예술이자 학문으로 승화하게 되었다. 이는 붓의 작용이 삼라만상의 변화에 작용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서법 예술은 시대의 역사적 변천에 따른 그 특성에 따라 특징을 정의할 수 있는데, 진(晉)대에는 운치(韻致)를 위주 했고, 당(唐)대에는 법식(法式)을 제일로 삼았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변화하는 서법에 의미(意味)를 강조했으며 원과 명대에서는 글자가 지닌 자태(姿態)를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2015, 5, 30. 지성룡 작성

서예란 무엇인가? /서예술(書藝術)이란?-2

서예란 무엇인가? /서예술(書藝術)이란?-2

동양 3국이 주도하는 서법예술로서 우리가 흔히 서예라 부리는 기예는 한자를 사용하여 글씨를 예술적 방법, 양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중국은 흔히 서학이라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는 명칭에 이의 없이 받아들여져 사용되며 불리우고 있다.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는 이름으로 글씨를 쓰는 고유하고 독특한 예술적 양식이 존재한다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한글이나 국한 혼용의 서예술이나 마찬가지 개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의 문자를 예술로 어느 정도는 응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자처럼 글씨를 쓰는 문화가 광범위하고 엄격하게 이론으로 정립하여 적용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법은 한자문화권을 대변하는 독특한 문화로 인식되어 왔다.
현재에도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이 주도하고 다른 동남아시아나 구미 여러 나라에서 동양3국의 교민들에 의해 활성화되고 있는 실태다. 

서예를 옳게 인식하기 위해 우선 서예술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서예의 역사는 비갈, 또는 비석의 역사로 시작된다. 
비석(碑石)이란 말은 인공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든 세워놓은 돌이면 비석이 된다. 이런 개념은 일찍이 허신이 설문해자를 지을 때 “碑 竪石也”. 즉 ‘비라는 것은 세워 놓은 돌이다’ 라고 한 말에서 엿 볼 수 있다.

세워놓은 돌이 각문을 했으면 비각일 것이고 천연의 바위벽에 각을 했으면 마애(磨崖)비가 될 것이다. 
서도인들이 중시하는 비는 대략 당 시대에 까지 이르는 비각의 역사를 말한다. 만당시기까지 에 이르는 서예술의 도도한 역사는 대체로 비각에 그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도사를 말할려면 돌로 새겨진 비갈의 역사를 말 하기전에 이 있었던 종정문의 역사를 앞세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서학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비의 석각문자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석고문이 아닐 수 없다. 석고문을 비로 보느냐는 견해는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어쨌든 인공적으로 세워 놓여진 모나지 않은 둥근 북처럼 생긴 10개의 사각의 큰 돌(높이 1m, 지름60cm)에 문자를 새겼으니 최초의 비문이라 보아도 이의 없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진양공秦襄公 시대에서 문공(文公) 헌공(獻公) 목공(穆公)에 이르는 시기 제작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설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이들의 재위 기간인 BC 718~621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석각으로는 최고의 연대를 지닌 유물이다. 

중국 서예의 시원은 문자의 발명과 동시에 있었던 듯하나 원초(原初)적인 것은 남아 있지 않아 그 진상은 알 수 없고, 다만 기원전 14세기 내지 BC 12세기의 것으로 은(殷)나라 시대의 갑골문(甲骨文)이 있는데 이는 주로 점칠 때 사용하던 문자였으므로 흔히 복문(卜文) 또는 복술(卜術)문, 주술(呪術)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종정문이 있기 전 까지는 갑골문의 진상을 아지 못했는데 세기말 경, 중국의 정세가 극도로 혼란할 즈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이러니한 배경으로 나타난 다량의 갑골문은 뜻 있는 학자와 정치인들의 노력으로 수집,보전.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은(殷)시대에서 주(周)시대에 이르는 금문(金文), 이른바 종정문(鐘鼎文) 있는데 즉 제기(祭器)나 무기(武器), 악기(樂器) 기타에 새긴 명문(銘文)을 말한다. 

종정문 이전의 갑골문은 귀갑(龜甲) 또는 수골(獸骨)에 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직선(直線)과 절선(折線)이 많아 딱히 우리가 지금의 서예술에 반영하는 것에 자체의 예술성이 있어서가 아니지만, 소위 용골(龍骨)이라 하는 짐승의 뼈나 거북의 배딱지에 일단 처음에는 글자를 필기구로 새겨 넣었을 가능성도 크고 아니면 직접 칼로 그어 도형에 가까운 문자의 문양을 새겼을 것이지만 예술적인 응용의 가치가 크므로 서예인들이 서법 이수과정에 필히 거치는 단계가 된 것이다.

도형에 가까운 그 문자가 응용의 가치가 크고 또 그렇게 응용되어 왔기에 예술적인 발전을 하여 온 것이다. 
뒤의 종정문이라는 것은 틀(鑄型)에 글자를 써서 새기고, 이 틀에 쇠물을 녹여 부어 주조(鑄造)

서법의 원류는 왜 중요한가?

비첩의 역사.

비첩의 역사는 곧 서예술의 역사다.
장구한 오천년의 역사는 비갈을 필두로 끊임없는 서체의 변화속에 문자를 하나의 의사전달 매체를 넘어 예술의 지경에 자리매김 하기 까지의 제일 매개의 원인이다.

서예인이 비의 역사를 모른다면  곧 서법 자체를 모르든지, 아니면 부인하는 격일테니 비의 역사를 통해 서법의 진면을 궁구함이 서예인들에 주어진 필수 과업이라 마땅 할 것이다.

왜 비첩인가 하는 상기 제일 원인을 탐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발전된 서예술에 미친 원인인 비첩의 매개가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될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서법계에서는 서법의 원류를 궁진함에 있어서 호태왕비를 시작으로 김생의 몇 안 되는 필적과 조선조 시대의 많은 비문 글씨에서 원류를 찾고자 하는데.
우리것에서 근본을 취하자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이지만 과연 서법 탐원이 가능할까.
지나친 자아적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의식은 오히려 서법의 진취적 탐구에 역행할 뿐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조선의 상고시대를 아무리 거슬러올라도 우리에게는 갑골문자나 종정문의 흔적이 없다.
상고시대의 문자 탐원은 물론 선진시기의 문자 흔적도 없는데 애써 우리역사에서 서법근원을 찿으려한다면 서법탐원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결과일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서법의 종주인 중국이 갖고있지 않는 우리만의 특수 문자의 예술성을 갖고있다.

이점은 일본의 가나문자도 우리 한글만큼이나 발전된 장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글의 문자예술이 한자에 버금가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빗나간 민족주의사상으로 서법의 원류를 부정하고 여린 애국심에 흥정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할 것이다.

서예의 길은 비단 한자문화만이 유일한 길이 아니고 우리의 문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단순한 서사기능을 벗어나 예술행위로 승화한 마당에 더욱 정진한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에 힘써야 할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순수한 궁체의 미를 도적질하는 일부 서예가들이 있다.
일러 한글의 로로운 장르라 호도하는데 엄연한 세종대왕의 창제원리가 있고 그여따라 수밴여년을 내려온 전통의 원리가  있음에도 새로운 기법인양 괴기스러운 자형을 개발하여  서예가들을 현혹한다.
양식있는 한글 서예가들이라면 쓴 웃음으로 일관하고 말 일이지만 진취적이며 새로운 것에 댜한 탐원에 목말라하는 초심자들에겐 현혹의 대상이된다.
이미 상당히 득명한 기성세대의 서법가들에게서 나온 서작행위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 최근의 캘리그라피의 왕성한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데 다만 우리글의 원류에서 크게 벗어날까 걱정이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아예 서법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고 독립적인 장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법의존적으로 태동하던지 아니면 서법과 무관한 독립적 장르로 발전하던지 말이다.



북위해서란 무엇인가? 당  해서의 시원.

북위해서란 무엇인가? 당  해서의 시원.

북위체 해서와 당 해서체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한다면 "해서란 무엇인가"의 답이 명료해 질것이다.
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다면 바로 서예사적으로 볼때 동일한 관계라 볼수 있을 것이다.
아니 더 엄밀히 표현하면 조,부,자의 관계라 할수 있다.

이는 단순한 해서입장에서 본 가벼운 평이니  
조는 졸박하기 그지없는 기원 500년을 전후한 북위 문성제 시기의 천의무봉한, 이르테면 조상기 형태를 주류로 한 서체일것이고 
부는 좀더 다듬어져 형태미와 구성에서 일층 발전되고 그러면서도 나아가 서법상 근본을 잃지 않던 시기의 북위 말기와 수시대의 화미한 서체일것이니 주로 묘지명으로 원현진,사마병, 사마현자, 원준 묘지명으로 대변하는 지명들일 것이다.

기러다  서체는 초당에서 만당의 시기에 들어서기까지 구성미나 심미적 측면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
초당의 서예 3대가 구양순 저수량 유공권을 필두로하여 중당의 안진경 서체에 이르면서 완성을 보게되니 이를 자에 해당하는 격이 아닌가 싶다ᆢ.
서체의 질박한 멋에서 근원을 찾고 고졸한 맛에서 원류를 찾고자 한다면 북위체 중 아마도 용문 조상기가 으뜸일것이다.

서예기법/북위해서/북위해서의 매력.


서예기법/북위해서/북위해서의 매력.
북위해서가 지닌 매력은 아무래도 그 질박함에 있다.
서예기법을 논한 이론도 많고 다양하며 하나의 서체를 두고도 여러각도의 평론을 통해 다양한 이론을 구사하는데 북위해서에 대한 관조는 아무래도 서법의 원류를 탐구하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한다.

섯부른 서체 탐원이론은 망양다기라, 자칫 서법의 근원에서 멀어져 근본을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으려니와 자기만족에 도취한 서법탐원은 뿌리를 잊은 화미한 작품구상에 천착할 뿐, 진정한 서학자의 위치를 잃을 수 있다.

모든 기예가 다 그렇지만 서예는 그 심원한 근원의 뿌리를 잃으면 떠다니는 부평초 같이 되어 만인의 눈요기 꺼리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낫 말초 신경만 건드릴 뿐 곡학아세 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 한다.

서예가들이 이런 자가당착 하는 모순에서 벗어나려면 모를지기 이론에 빈약해서는 안 될이며 그 이론이라는 것 역시 정확한 전고에 바탕을 두고 실제와 접목되어야 한다.
전고에 근본을 두고 그것이 실제와 접목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서학에서 전고라는 것은 법첩이라 이름하는 비갈과 첩서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논하는 5체를 말한다면 각체가 지닌 특징에서 우러나오는 매력이 무엇인가를 터득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북위해서가 당 해서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무엇이 다른가를 이해하고 그 다름이 가져오는 절대 묘미를 찾이야 한다.

고로 북위체라 하면 북위체 특유의 성질에서 오는 윈초적 특징,매력을 찾고 다시 그 본능에 이르러 북위해서의 생성유래와 북조인들의 생활과 성격이 어떻게 글씨의 특징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는가를 궁구해야 진정한 북위해서의 맛을 이해할  수 있으며 북위해서가 지닌 기본적인 핵, 선질에서 오는 질감을 이해할 것이다.

그 질감은 한마디로 삼절의 요체에있다.
삼절은 붓의 중봉을 잡아가기 위한 동작이요 절차다. 글자가 천대 만대에 이르도록 감상자는 그 질감의 효과에서 호흡을 느끼고 생명력을 느껴야 진정 작품이 되지 않겠는가?

최근의 북위체를 썼다고 흔한 공모전에 두각을 내미는 서예가들이 많다.  날카로운 능각을 표현 할이 없어 붓을 이중 운필하는 모습을 보는데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북위체(北魏體)/육조체(六朝體)란 무엇인가?

북위체(北魏體)/육조체(六朝體)란 무엇인가?

원래 육조란 중국에서, 여섯 왕조(王朝)가 있던 시대, 즉 삼국(三國) 시대의 오(吳)나라 이후, 당(唐)나라 이전까지,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 시대와 수(隋)나라 까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서체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조체라 함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오히려 한때 하북을 지배했던 북방의 이민족 선비족의 강인한 서체로, 북위서체, 또는 북위체, 북위해서(北魏楷書)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근자에 북위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북위체를 쓸 줄 모르면 한자서예의 기본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 역시 꼭 그렇다고는 보지 않지만 북위체를 강조하기 이전에도 북위체의 기본이 살아있지 않으면 글씨의 연미한 나약성으로 발전적이고 진취저인 향방이 잡히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요즘은 서예 전시회 마다 육조/북위체 작품이 돋보이게 출현하고 서실마다 학습자들의 글씨와 교재도 북위체를 많이 배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북위체라는 것은 북방 이민족이었던 선비족(鮮卑族) 위(魏)나라가 중화화(中華化)기 위한 일환으로 문자부터 수렴하여 동화, 동질정책을 쓰기 시작한 이래 문성제(文成帝)에 이르러 꽃을 피우는데, 그 당시의 위나라 문자를 이르는 것이며 그리고는 수대(隋代)로 이어진 묘지명(墓誌銘)과도 관련된 명칭을 지닌다. 그러나 수대의 묘지명 계통은 어디까지나 수해서(隋楷書)라 알컬음이 옳다.

문자의 연대순으로 말하자면 물론 예서의 팔분서체를 지나, 해서 시기에 이르렀으니 시나브로 서법이 예서체에서 나옴 즉 하겠지만 기실 서법의 특장한 점은 꼭 그렇게 연관되어 발생하지 않는다.

특히 북위체의 독특한 발전은 후대에 서체 변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고 아울러 서법의 근원적 본질을 극면하게 드러낸 관계로 이전의 갑골문이나 종정서체나 진전, 팔분 예체에서도 보기 힘든 붓의 질감에서 느끼는 심각한 서법의 질적 요소를 함유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오래 전, 북위서체에 대한 서법가들의 관심은 높으나 적절한 입문서가 하나도 없고 다만 일본에서 나온 몇 권의 입문서에 의지하고 있음을 개탄하여 국내 최초로 “북위해서 교본”:을 만들었다.

단지 북위체의 자형을 확대 반전하여 이해할 수없는 용어로 설명한 일본의 세필(細筆)풍의 교재를 탈피하고 실제 이론과 접목한 최초의 이론/실기 교재이다.

역대 명필법가들이 쓴 서론과 추사 김정희 선생이 종종 구사한 필법용어를 실제 응용한 국내 최초 북위해서 실기 교본은 북위시대의 가장 강직한 서체 용문조상기를 위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