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서론3

書贈台濟(서증태제)

書贈台濟(서증태제)

歐書出於劉仲寶 褚書出於史陵 然不必劉史 六朝批判 如李仲璇 張孟龍 刁遵 高使君(高貞碑) 始平像 魏齊諸造像藥方 無非劉史之所自. 點波間架 一無敢變改舊規 此所以上溯鍾索也. 不由此逕 直欲接武山陰 妄標晉體 謂之蘭亭 黃庭 如此皆歸於無知妄作耳.

구의 글씨는 유증보에게서 나왔고 저의 글씨는 사릉에게서 나왔다하나 그러나 반듯이 유와 사에게서만 나온 것은 아니니 육조 시대의 비판으로 이중선비 장맹룡비 조준묘지 고사군비 시평상기 위제의 여러 조상기 약방기 들이 유씨와 사씨의 것과 같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점이나 삐침 그리고 간가의 법식으로부터 한 가지도 감히 옛 법규를 감히 바꾸지 않은 까닭으로 종요와 삭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길을 거치지 않고 곧장 산음으로 잇대려고 함부로 진체를 표방하여 난정서니 황정경이니 하고 일컫는데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일지도 못하고 함부로 날뛰는 것이다.



劉仲寶(유중보)-북제(北齊)사람. 중보는 자. 벼슬은 삼공낭중(三公朗中). 당의 두기(竇臮)의 술서부(述書賦) 주(注)에 구양순이 중보로부터 배웠다고 하였으나 중보의 필적은 남은 것이 없고 행장 또한 남은 것이 없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史陵-수인(隋人). 당의 장회관의 서단에 보면 수대의 명필로 나온다. 당의 태종, 한왕(漢王), 원창(元昌), 저수량이 모두 그에게서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李仲璇碑-이중선이 공자 묘당의 수리를 기록한 내용으로 서체는 정서체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전, 예, 비백이 혼합된 글씨.
藥方記-용문조상기 20품 중 하나.

書示佑兒(서시우아)

書示佑兒(서시우아)

원문
書法非醴泉銘 無以入手 已自趙彛齋時 以醴泉銘 爲楷法圭臬 其時豈無右軍書之黃庭樂毅論也. 皆轉轉翻訛 不可準則 不如原石榻取之眞蹟 所以不得不俛首 取醴泉化度等碑也. 化度今無原石 如宋榻范氏書樓本 非東人所可得見 尙有醴泉之原石 拓本無恚 設有殘泐過甚 碑此無以上溯於鍾索舊規 何以舍是他求也. 

글씨 쓰는 법은 예천명이 아니면 손에 익힐 수 없다. 조이재(맹견)때로부터 예천명으로 해서법의 모범을 삼았는데 그때인들 어찌 왕우군이 쓴 황정견과 악의론이 없었겠는가. 모두 일리저리 글러 다니면서 잘못 옮겨져서 준칙을 삼을 수 없었으니 원래의 비석에서 진적을 탁본해 오는 것 만 못하였으므로 예천명이나 화도사비 등의 비석에 머리를 수그리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느니라. 화도는 지금 원석이 없어졌고 송나라 때 본 뜬 범씨 서루본과 같은 것은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얻어 볼 수 없는 것이나 예천의 원석은 아직 남아있고 탁본도 별 탈 없어서 설혹 희미하고 뭉그러진 것이 지나치게 심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아니면 종요나 삭정의 옛 법도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어떻게 이를 버리고 다른데서 구하겠느냐.

汝所謂纔書數字 字字各出 終不歸一云者 是汝可以入門之進景處 須潛心力追. 忍過此一關 然後可以快得悟處 切勿以此爲不成而退轉 益加用工可也. 吾則六十年 尙不得歸一 況汝之初學者乎. 第汝此語 吾甚喜之 以爲必有所得 在此一語. 切忽泛看漫過 爲妙爲妙. 

너의 이른바 ‘겨우 몇자를 썼더니 글자마다 각각 달라서 끝내 한결같지 않았다’하는 것은 이것이 네가 가히 입문하여 어느 정도의 경지에 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어 힘껏 쫒아가도록 하여라. 참고 이 한 관문을 지나고 난 후에라야 가히 통쾌하게 깨닫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이것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나지 말고 더욱 힘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육십년 동안을 하였어도 오히려 아직도 한결같지 않거늘 하물며 너같이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서랴. 다만 너의 이 말로 나는 심히 기뻐하였나니 반듯이 얻을 바 있는 것이 이 한마디 말이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함부로 보고 아무렇게나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隸書是書法祖家 若欲留心書道 不可不知隸矣. 隸法必以方徑古拙爲上 其拙處又未可易得. 漢隸之妙 專在拙妻 史晨碑固好 而外此 又有禮器 孔和 孔宙等碑. 然蜀道諸刻甚古 必先從此入 然後可無俗. 隸凡分賦態市氣 且隸法 非有胸中淸高古雅之意 無以出手. 

胸中淸高古雅之意 又非有胸中文字香 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 又非如甚尙楷書比也. 須於胸中 先具文字香 書卷氣 爲隸法張本 爲寫隸神訣. 近日如曹知事 兪綺園諸公 皆深得隸法 但少文字氣 爲恨恨處李元靈隸法畵法 皆有文字氣 試觀於此. 可以悟得 其有文字氣 然後可爲之耳. 家儲隸帖頗具 如西狹頌 是蜀道諸刻之極好者也.

예서는 서법의 근본이니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면 예서를 알지 않을 수 없다. 예서를 쓰는 법은 반듯이 모지고 굳세며 예스럽고 졸박한 것으로 으뜸을 삼아야 하는 것이나 그 졸박한 것은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한의 예서의 신묘함은 오로지 졸박한 곳에 있는 것이니 사신비가 정말 좋고 이 밖에는 또한 예기 공화 공주 등의 비가 있단다. 그러나 촉지방의 여러 석각은 심히 옛스러워서 반듯이 먼저 이로부터 좇아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 뒤에라야 가히 속되지 않을 수 있느니라. 

예서는 대체로 번드르르한 모습이나 시정의 기풍을 걸러내야 한다. 또한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이 있지 않다면 손에서 나올 수가 없느니라. 가슴속의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은 또한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지 않다면 팔뚝 아래와 손가락 끝에 드러나 피어날 수 없으니 보통 해서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단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 되는 것이요 또한 예서 쓰는 신묘한 비결이 되는 것이니라. 

근래 조지사(曹知事)나 유기원(劉綺園)같은 여러 분들은 모두 예서 쓰는 법을 깊히 터득 하였지만 문자기가 부족하여 한스러운 것으로 삼는단다. 이원령(李元靈)의 예서 쓰는 법과 그림 그리는 법은 모두 문자기가 있으니 시험 삼아 이를 살펴 보아라.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 문자기가 있어야만 그런 뒤에 그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집에 모아둔 예서첩은 자못 많이 갖추어져 있는데 서협송과 같은 것은 촉 지방의 여러 석각 중에서도 지극히 좋은 것이다.

吾東畵蘭 絶無作者 惟伏覩 宣廟御畵天縱 葉式花格 似鄭所南法. 盖於是 宋人蘭法 流傳於東 御畵亦以臨倣也. 所南畵 中國亦罕傳 近日所習 又皆元明以後法耳. 

우리 동쪽에 난을 치는데는 거의 사람이 없고 오직 선조대왕의 어화가 뛰어남을 뵈었을 분인데 잎을 치는 법식과 꽃의 품격이 정소남의 법식과 같았다. 대체로 그때에 송나라 사람의 난치는 법이 우리 동에 까지 흘러 들어와서 어화도 역시 임모하고 모방하였던가 보다. 정소남의 그림은 중국에서도 역시 드물게 전해지니 요사이 연습하는 것은 모두 원명이후의 법식일 뿐이다.

須有工於畵者 未必皆工於蘭. 蘭於畵道 別具一格 胸中有書券氣 乃可以下筆.

春濃露重 地煖草生 山深日長 人靜香透 此條曹彛齋語.

古人寫蘭 不過一二紙 未嘗連幀累幅如他畵 是不可强之者. 世之要蘭畵者 不知此境之極難 或以多紙 至以八疊强索 皆謝不能.

비록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반듯이 모두 난초를 잘 치는 것은 아니다. 화도에 있어도 난초는 따로 한 격식을 갖추는 것이니 가슴속에 서권기가 있어야만 이에 가히 붓을 댈 수 있느니라.

‘봄 깊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는다. 산 깊어 해는 긴데 자취 고요하여 향기만 쏜다.(이는 조이재의 글이니라)

옛 사람들이 난 치는데 있어서 한 두장에 지나지 않아서 일찍이 다른 사람 그림처럼 잇대어 여러 폭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사이 사람들의 난초 그림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경지의 지극한 어려움을 모르고 혹은 많은 종이로써 여덟 벌에 이르기 까지 억지로 뺏어내려 하지만 모두 할 수 없는 것으로 사절하고 있단다.


曹知事(조지사)-조윤형(曹允亨), 조선 창녕인, 자는 치행(稚行),시중(時中). 호는 송하옹(松下翁). 백하 윤순의 사위. 자하 신위의 장인. 음관(蔭官)으로 지돈녕(知敦寧)에 이르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했다. 특히 예서를 잘 썼다.
兪綺園(유기원)-유한지(兪漢芝), 조선의 기계인(杞溪人). 벼슬은 영춘(永春) 현감에 그쳤으나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일세를 풍미했다.
李元靈(이원령)-이인상(李麟祥), 조선의 완산인,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館), 보산인(寶山人). 백강 이경여의 현손. 서출로 벼슬은 현감에 그치다. 시서화 모두 능해 삼절로 불리웠다. 특히 전서를 잘 썼다.
文字香 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운. 
天縱-타고난 그대로의 성품. 
所南畵-정사초의 그림. 정사초[鄭思肖]는 1241(남송 순우 1)~1318(원 연우 5)년간의 인물로 자는 억옹(憶翁). 호는 소남(所南). 복주(푸젠성) 근교인 연강 사람으로서 강남 지방에 살았다. 송 멸망 후, 종실 조씨(趙氏)의 문자 일부를 취해 사초(思肖)라 칭하며 충성심을 표명했다. 남송 말에 박학광사과(博學廣詞科)에 합격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고 원군에게 강남이 함락된 후 은거, 묵란을 잘 그렸으나, 이민족에게 더렵혀진 국토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로근(露根)의 난’을 그렸다.
春濃露重 地煖草生 山深日長 人靜香透-봄 깊어 이슬 많고 땅 풀려 풀 돋는다. 산 깊어 해는 긴데 자취 고요하여 향기만 쏜다/조이재의 싯 글.
連幀累幅-잇대어 여러 폭으로 그리는 것.

書贈方老(서증방로)

書贈方老(서증방로)

원문
吾輩之於隸書 平生所心摹手追 在西京東京古法 及其所成就 纔是唐之韓擇木 蔡有隣 臼窠 至於楷體 欲探歐褚門逕 亦不過明沈氏 則若其上溯 六朝之刁遵高湛 高貞 武平 天統 始平諸碑 如天上之難 又況上溯山陰耶.

山陰最以雄强見長 此其神髓也. 如非北碑 無以見其雄强 是豈今日通行之 黃庭 樂毅所可得也.

우리가 예서에 있어서 평생 마음을 두고 본 따는 것은 서경(전한)과 동경(후한)의 옛 법을 뒤 쫒는데 있었으나 그 성취한 것은 겨우 당나라 한택목, 채유린(蔡有隣)의 구과(일정한 틀이나 진부한 격조)일 뿐이었고 해서체에 이르러서는 구,저의 문경(門逕)을 찾고자 하였으나 명나라의 심주(沈周)를 지나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곧 만약 그 육조시대의 조준 고담 고정 무평 천통(天統) 시평의 제비들로 거슬러 오르고자 한다면 하늘에 오르려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산음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산음은 가장 웅강한 것으로 장점을 삼으니 이것이 그 신수(神髓)입니다. 북비가 아니라면 그 웅강한 것을 볼 수 없는데 이 어찌 오늘날 통행하는 황정, 악의에서 얻을 수 있으리오. 


方老-인물. 누구인지는 불명.
韓擇木-당의 창려인(昌黎人). (대력766~779),후한의 채옹에게서 예서의 법을 익히고 당시 문사로 이름을 떨침. 이양빙의 전서와 쌍벽을 이루다. 영양왕비 주씨의 묘비를 정서로 쓰고 그 외에 많은 비를 예서로 쓰다. 
蔡有隣-당의 제양인(濟陽人), 채옹의 18대 손. 팔분서를 잘 썼다.
沈氏-심주(沈周), 명의 강소성 장주인(長洲人-1426~1509).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石田), 백석옹(白石翁). 시,문,서,화에 뛰어나다. 시는 소식, 육유. 서는 황정경을 배웠다. 그러나 그림으로 이름이 더 뛰어나 오(吳)파의 종장으로 일컬어지다. 그의 문인인 당인,문징명,구영과 함께 명의 사대가로 일컬어졌다. 
天統 始平諸碑-천통연간(북제 후주의 연호로 565~569)에 이룩된 여러 조상기.

 

書贈鄭六(서증정육)

書贈鄭六(서증정육)

원문
東人書 羅麗間古碑 皆歐法 直可以上所山陰. 又有寫經金書者 羅書尤古 非麗可及. 嘗見東京廢塔中所出 墨書光明陀羅尼經 一字不損 如昨書者 卽唐大中年間所書 在金生前六七十年以上. 筆法極古雅 當與文武,神行,䥐藏諸碑甲乙 金生 亦當遜一籌矣. 自本朝以來 安平,姜,成 猶不違失前規.

동쪽 우리나라 글씨에 신라, 고려사이의 옛 비석은 모두 구양순 필법이어서 곧장 산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또 금니로 글씨를 써서 경을 베낀 것이 있는데 신라 때 글씨가 더욱 옛스러워 고려 때 글씨로는 미칠 수 없다. 일찍이 동경(경주)의 폐탑에서 나온 묵서(光明陀羅尼經)를 보니 일자도 훼손되지 않고 어제 쓴 것 같았다. 곧 당나라 대중연간(847~859)에 쓴 것으로 김생보다 앞서는 것으로 6,70년 이상이나 된다. 필법이 극히 고아하여 마땅히 문무, 신행, 무장과 같은 여러 비들과 갑을을 다투어야 할 것으로 김생은 역시 한 등급 아래로 양보해야 할 것 같다. 우리 왕조이래로 안평대군(安平大君-瑢), 강희안(姜希顔), 성임(成任)은 오히려 예전의 법규를 잃지 않았다. 

白餘年來 一種書法 盡掃歐褚 直欲商探鐘王 又未見鐘王一字 妄自拔幟登壇 商君之盡廢井田 雖爲秦人富强 後世亦不能復. 然三代之溝洫畎澮 遂不可見耳.

그런데 백여년 이래로 일종의 서법이 나와서 구와 저의 서법을 모두 쓸어버리고 곧장 조요와 왕희지로 더듬어 올라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아직 종요와 왕희지의 글씨는 한 글자도 보지 못 하고 정신없이 날뛰어 왔다. 상군(商君-鞅)이 정전법을 모두 폐하여 버려서 비록 진나라 사람들이 부강하였다 하지만 후세에는 역시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삼대의 붓도랑도 마침내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上溯山陰-산음으로 거슬러 올라감, 즉 진의 진체(晉體)를 얻으로 거슬러 오른다는 말.
東京廢塔-경주 창림사지 석탑. 순조 24년(1824)에 탑 안에서 유물을 취해 냈다.
光明陀羅尼經-無垢淨光陀羅尼經을 말 함.
文武-신라문무왕릉비.
神行-海東故神行禪師之碑.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우림동에 있었으나 망실되고 탁본이 전해짐. 왕희지체 행서 비갈임.
䥐藏-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 경북 월성군 내동면 안곡리 무장사지에 있던 것을 1915년 경복궁으로 이전함. 망실되었던 것을 추사가 찾아내어 고증함. 황희지 행서체.
東人書-조선의 글씨. 
羅麗間古碑-신라와 고려사이의 옛 비석. 
歐法-구양순의 서법. 
直可以上所山陰-곧 바로 진체(晋體)의 묘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 
金生-신라의 명필 김생, 김생[金生-711~791]은 신라의 대표적 서예가로 일찌기 서도(書道)에 정진하여 예서(隸書), 행초서(行草書)에 뛰어난 천품을 발휘하였다. 고려 때 사신 홍관(洪灌)이 송(宋)에 갔을 때 김생의 글씨를 보이자 사람들은 왕희지(王羲之) 이후의 명필이라고 극찬을 했으며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 불렀다. 그의 작품 『백율사 석동기(柏栗寺 石憧記)』(현재 경주 국립박물관 소장)와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경북 영천군 소재)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安平,姜,成-안평대군(安平大君-瑢), 강희안(姜希顔), 성임(成任). 안평대군은 조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며 둘째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서예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전한다. 
강희안은 조선 전기(세종~세조)의 사인(士人) 서화가로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齎)이며 진주(晋州)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인수부사(仁壽府事) 등을 역임했다. “시서화의 삼절(三絶)” 이라 칭송을 받았으니 유작이 적다. 『한일관수도』, 『도교도(渡橋圖)』(모두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등은 소품이기는 하나 남송 원체화(院體畫)를 닮은 화풍을 보였다.
성임은 1421(세종 3)∼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안재(安齋). 성품이 활달하고 식견이 풍부하며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다.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해서·행서를 특히 잘 썼으며, 글씨로는
<원각사비 圓覺寺碑<한계미묘비 韓繼美墓碑<최항신도비 崔恒神道碑>등이 있고, 경복궁 전문(殿門)의 편액과 왕실의 사경(寫經) 등 국가적 서사(書寫)를 많이 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율시에 일가를 이루었다.

題淸愛堂帖後(제청애당첩후)

題淸愛堂帖後(제청애당첩후)

원문
陳星齋云 唐拘於法 宋取意. 晉韻千秋 意誰辨 此爲書家三昧. 
石菴書 頗得晉韻 當時書家 有首推何義門 姜西溟 趙大鯨者 有推王擬山 陳香泉汪退谷者 又如覃溪 成邸梁山周 王夢樓 互相甲乙 又如張得天 孔葒谷諸人 炳朗一代 不得不以石菴爲巨擘. 

진성재가 말하기를 ‘당은 진의 법도에 구속되었고 송은 그 본뜻을 얻으려 하였다. 진의 기운이 천년을 지나왔거늘 마침내 누가 변별 하리오마는 이것이 글씨 쓰는 사람의 지극한 경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석암의 글씨는 자못 진나라의 기운을 얻었으니 당시 서예가로는 하의문, 강서명, 조대경 같은 사람을 으뜸으로 뽑아낼 수 있고 또 왕의산, 진향천, 왕퇴곡 같은 사람을 뽑아낼 수 있으며 또 옹담계, 성저, 양산주, 왕몽루가 서로 갑을을 다투고 또 장득천, 공홍곡과 같은 여러 사람들이 불꽃처럼 한 시대를 밝혔지만 석암으로써 크나큰 엄지가락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其書厚而能脫 入乎古人 而出乎古人 晩年妙境 神妙不測. 嘗於劉雲房尙書家壁四面 自東至西 皆石菴玉板紙所書 字大如小兒手掌 又如小兒墨戱 盡脫筆墨蹊逕 天衣無縫 帝珠互映 非人力所可能 魄力特大 可以退密 可以彌六 董香光以後 初有耳.

그 글씨는 중후하면서도 능히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옛 사람의 법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여 만년의 오묘한 경지는 신묘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일찍이 유운방 상서댁의 벽 사면에 동으로부터 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석암의 옥판선지에 쓴 것들이 걸려 있었는데 글자의 크기가 아이 손바닥만 하였고 또 아이가 먹 장난한 듯 하여 모두 글씨 쓰는 길에서 벗어났으나 천의무봉하고 수 많은 구슬들이 서로 비치듯이 빛나서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한바가 아니었으며 기백 있는 힘이 특별히 커서 빽빽하게 쓰지 않고도(가히 빽빽한 것을 물리칠 수 있어도) 가히 천지 사방에 가득 채운 듯 하였으니 동향광 이후의 처음 있는 것일 뿐이다.

董書東人皆眇之 或以爲專事美麗 是不知董書之如何者. 若以董人論之 石峯之氣格 不能及董十之一 卽東人眼光所未及 又何論於石菴哉.

劉文正書 又極工 嘗見所書道德經蠅頭細字 與文衡山金剛經 可媲美. 其下石菴細書拔語 反有不及之意 靈芝醴泉 果有本源歟. 丙辰人日書. 是石菴書此卷之一周甲也.

동기창의 글씨는 우리 동쪽나라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제대로 볼줄 몰라서 혹은 오로지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 일삼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이것은 동기창의 글씨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논하기를 한석봉의 기운과 품격에 비기어 논한다면 동기창의 열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곧 우리 동쪽나라 사람들의 눈빛이 아직 미급해서인데 또 어떻게 석암을 논하겠는가.

유문정의 글씨도 또 지극히 잘 썼으니 일찍이 그가 쓴 도덕경의 승두세자를 보았는데 문형산의 금강경과 아름다움을 짝 할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석암이 잔 글씨로 발어를 썼는데 도리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있으니 영지나 예천도 과연 본원이 있는 것인가. 

병진 인일에 쓰다. 이 날은 석암이 이 책을 쓴지 한 주갑(60년)이 되는 날이다.


陳星齋-진조륜(陳兆崙). 성재는 자. 호는 句山(구산), 옹정(擁正)(1723~1735)때의 진사로 벼슬이 통정사(通政使)에 이르다. 시문에 뛰어나 연경의 사대부들이 종장(宗匠)으로 삼았으나 스스로 말하기를 시문보다 글씨에 제일이고 시문은 그 아래라고 평했다.
石菴-유용(劉墉).
何義門-하작(何焯) 
姜西溟-강신영(姜宸英) 
趙大鯨-청의 인화인. 자는 횡산(橫山). 호는 학재(學齋). 조맹부와 동기창의 필법을 체득하다.
王擬山-왕탁(王鐸). 명나라 강남 맹진인(孟津人). 호가 의산. 시,서,화,문에 모두 능하였다.
陳香泉-진혁희(陳奕禧)
汪退谷-왕사횡(汪士鋐)
覃溪-옹방강(翁方綱)
成邸-성친왕(成親王)
王夢樓-왕문치(王文治).청의 강소 단도인. 자는 우경(禹卿), 호가 몽루(夢樓)임.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났다.
張得天-장조(張照)
孔葒谷-청나라 곡부인. 호는 곡원(谷園), 하곡(蕸谷). 많은 묵적을 모각하였다.
劉雲房-유권지(劉權之). 청나라 장사인(長沙人). 운방은 호임. 
董香光-동기창(董其昌).
劉文正-유통훈(劉統勳. 청의 산동 저성인(諸城人), 자는 연청延淸, 호는 이둔爾鈍. 유용(劉墉)의 부.
文衡山-문징명(文徵明). 명나라 강소 장주인長洲人. 이름이 벽(璧)이고 자가 징명(徵明)(징명). 형산은 호임. 
靈芝-왕자(王者)가 인(仁)하면 나온다는 향기 풀. 
醴泉-왕자(王者)가 선치(善治)하면 솟는다는 단 샘. 
人日-음력으로 정월 7일.
周甲-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