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서론-2

論古人書(논고인서)4

論古人書(논고인서)4

원문
右軍書亦如此 或有隱鋒書者 不露基節角 似若泯然一色 無肥瘦大小之分 細觀之 亦皆有差等 此書家之斲觚爲圓 一轉變者 如兩漢文體之鍊勾琢字 抽黃對白 而爲選理焉. 

今之書者 不知此之原流 動輒以爲書無大小畫 遂漫滅其陰陽向背麤細肥瘦 自古一定不敢易之體式 作一算子 惑矣.

元人作畵 以枯墨起手 漸次積墨 未了之樹 闒(다락문탑)茸之山 皆從天機得之大癡 有大癡皴 雲林有雲林皴 非人力所假而爲之.

우군의 글씨도 역시 이와 같아서 혹은 은봉(隱鋒)하여 쓴 것도 있는데 그 절각(節角)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흔연한 일색(一色)으로 되어 비·수(肥瘦) 대·소(大小)의 구분이 없으나 자세히 보면 역시 차등이 있다. 

이는 서가(書家)가 모를 깎아 원을 만드는 하나의 전변(轉變)인 것으로서 마치 양한(兩漢)의 문체가 종경에는 글귀를 단련하고 글자를 조탁하며 누런 것을 뽑아 흰 것과 대하여 문선(文選)의 이(理)로 된 것과 같다. 

지금의 글씨 쓰는 자는 이러한 원류를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글씨란 크로 작은 획이 없다 하여 드디어 그 음양·향배·추세(麤細)·비수(肥瘦)로써 예로부터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체식(體式)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하나의 산자(算子)를 만드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원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은 고묵(枯墨)으로써 시작하여 차츰차츰 먹을 쌓아 나가므로 끝마치지 못한 나무와 탑용(闒茸)한 산도 다 천기(天機)를 따라 얻어냈다. 
대치(大痴)는 대치의 준(皴)이 있고 운림(雲林)은 운림의 준이 있으니 인력을 빌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隱鋒-운필 할 때에 붓의 끝을 접어 감추는 일명 장봉의 행위.
節角-운필의 표현에 있어서 절(節)을 주고 각(角)을 주는 것.
肥瘦-굵고 가늠.
兩漢-전한과 후한.
大癡-허유의 아호.
雲林-허유의 운림산방

論古人書(논고인서)5

論古人書(논고인서)5

원문
鍾索以下書家 皆無傳訣 惟口口相授 至智永 始以永字八法 筆之於書 又有也字一法 然不專泥於窠臼 八法之轉變 爲七十餘則 又有隱術十餘筆 非語言文字可得形容 神以明之耳.

顔平原書 純以神行 卽從褚法來 與褚無一豪相近處 黃山谷 是晉人神髓人 或以無右軍戈派 有微飼 皆不知其變處而妄論之也.

종·삭(鍾索) 이하의 서가는 다 전하는 비결이 없고 오직 입과 입으로 서로 주고받고 할 뿐이었는데 지영(智永)에게 와서 비로소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글로 만들어 놓았으며 또 야(也)의 글자의 한 법이 있었으나 오로지 과구(窠臼)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팔법이 차츰 변하여 칠십여 칙(則)이 되었으며 또 은술(隱術)로 십 여 필이 있어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바 아니니 신(神)으로써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안평원(顔平原)의 글씨는 순전히 신(神)으로써 나가 이는 곧 저법(褚法)으로부터 왔으나 저와는 일호도 서로 근사한 것이 없다. 
황산곡(黃山谷)은 바로 진인(晉人)의 신수(神髓)라 했는데 사람들은 혹 우군의 과파(戈波)가 없다 하여 미사(微詞)가 있으니 다 그 변한 곳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논한 것이다.

如近日劉石庵自坡書入直到山陰門庭 今以坡書形相苛責石庵 然乎否乎. 

隸古亦如此 漢碑有虛和拙朴凶險可畏之相 以近人淺量小見 尙不能作 文衡山董香光一畫 何以作東京一波 又何以作西京一橫也. 

근일의 유석암(劉石庵) 같은 이는 동파(東坡)의 서로부터 들어가 곧장 산음(山陰)의 문정(門庭)에 이르렀는데 지금 파서(坡書)의 형상을 가지고서 석암을 가책(苛責)한다면 되겠는가. 

고예(古隸)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비(漢碑)를 보면 허화(虛和)하고 졸박(拙朴)하고 흉험가외(凶險可畏)의 상이 있는데 근세 사람들의 천량(淺量)과 소견(小見)으로는 오히려 문형산(文衡山)·동향광(董香光)의 한 획조차 능히 만들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 동경(東京)의 한 파(波)인들 만들며 또 어떻게 해서 서경(西京)의 한 횡(橫)인들 만들 수 있으리오.


鍾索-종요와 삭정. 종요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 ·서가(書家). 위나라 건국 후 조조 이후로 3대를 섬겨 중용되었다. 글씨는 팔분(八分: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에 뛰어나, 호소(胡昭)와 더불어 ‘호비종수(胡肥鍾瘦)’라 일컬어졌으며 또한 삭정은 삼국 위(魏) 경초(景初) 3~서진(西晋) 태안(太安) 2(239~303)사람으로 중국 서진의 서예가. 자는 유안(幼安). 둔황(敦煌甘肅省)의 사람. 후한 장진(張晋)의 외손. 젊을 때 낙양으로 가 태학에서 배워 경서에 통했고, 초서를 잘 썼다. 조왕륜(趙王倫)의 반란 때 공을 세워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다. 하간왕(河間王) 우(顒)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으나 전상을 입고 죽음. 초서를 위탄(韋誕)에게서 배웠으나 준험한 것은 위탄보다 나았다고 평가된다.『인소원법첩(隣蔬圓法帖)』『월의첩(月儀帖)』『희홍당법첩』(戲鴻堂法帖)』『출사표』가 있다. 또 팔분(八分)이 묘해서『무구흥비 母丘興碑』를 썼다고 한다.
窠臼-상투적인 격식. 틀에 박힌 절차나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論古人書(논고인서)6

論古人書(논고인서)6

원문
今漢碑現存 厪四十種 又有殘金零塼之可得摹追者 與蜀川相通 曲阜濟寧之外 怪畸不可狀 如公羊之非常可怪者 非習於左氏者所可窺測 是以凝之 甚或束閤 此雖一小道 其難如是 無以易言耳.

洪寶銘亦佳 雖不及始平武平 尙可證北朝古格耳.

지금 한비로 현재 보존된 것은 겨우 사십 종류이며 또 잔금영전(殘金零塼)으로도 모추(摹追)할 만한 것이 있는데 촉천(蜀川)과 서로 통하는 곡부(曲阜) 제령(濟寧)의 밖에는 형언할 수 없이 괴괴기기(怪怪畸畸)하여 마치 공양(公羊)의 비상하고 가괴(可怪)한 것은 좌씨(左氏)에만 익숙한 자로는 규측(窺測)할 바 못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심한 사람은 혹 묶어 저장해 놓고만 있으니 이 비록 하나의 소도(小道)이나 그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홍보명(洪寶銘)은 역시 아름답다. 비록 시평(始平) 무평(武平)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히려 북조(北朝)의 고격(古格)을 증명할 수 있다.


蜀川-촉 지방의 지명.
殘金零塼-쪼가리만 남은 금문과 벽돌쪼가리.
曲阜,濟寧-중국 산둥성[山東省] 의 곡부와 제녕시.
公羊-춘추 공양전의 저자.
左氏-춘추 좌전의 저자.
窺測-엿보아 헤아림. 
洪寶銘-북비의 하나.
始平 武平-위 시대의 연호. 
北朝 古格-북위 글씨의 고(古)스러운 품격.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1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1

원문
朴君蕙百 問書於余 叩其得書源流 余云 
余自少有意於書 卄四歲入燕 見諸名碩 聞其緖論 撥鐙 爲立頭第一義 指法筆法墨法 至於分行布白戈波點畫之法 與東人所習大異.

박군 혜백(蕙百)이 글씨를 나에게 물으며 서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므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이십사 세 적에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여러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발등법(撥鐙法)이 머리를 세우는 제일의 의가 되며 지법(指法)·필법(筆法)·묵법(墨法)으로부터 분항(分行)·포백(布白)·과파(戈波)·점획(點畫)의 법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익히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漢魏以下 金石文字 爲累千種 欲遡鐘索以上 必多見北碑 始知其祖系源流之所自 至於樂毅論 自唐時已無眞本 黃庭經 爲六朝人書 遺敎經 爲唐經生書 東方朔讚 曺娥碑等書 全無來歷 閣帖 爲王著所摹翻 尤爲 紕繆己爲當時如米元章黃伯思董廣川, 所一一駁正 中國之有識者 自樂毅黃庭等書 至於閣帖 皆羞道之.*紕-의복의 가선 비

한·위(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색(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의론(樂毅論)은 당의 시대부터 이미 진본은 없어졌고 황정경은 육조 시대 사람이 쓴 것이며 유교경(遺敎經)은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조아비(曹娥碑) 등의 글씨도 전혀 내력이 없으며, 각첩(閣帖)은 왕저(王著)가 번모(飜摹)한 것으로써 더욱 오류(誤謬)가 되어 이미 당시에 미원장(米元章),황백사(黃伯思),동광천(董廣川 동기창(董其昌) 같은 이가 일일이 박정(駁正)한 바 있으니 중국의 유식자들은 악의·황정 등의 서로부터 각첩(閣帖)에 이르러는 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大槪樂毅黃庭等書 若係眞本之可據 有唐之歐褚虞薛顔柳孫楊徐李諸人所書 一無與黃庭樂毅相似. 其不從樂毅黃庭入門 可證 但與諸北碑 如印印泥 且方勁古拙 無圓熟模稜者.

대개 악의·황정 등의 서는 만약 근거될 만한 진본이었다면 당의 구(毆 구양순(歐陽詢), 저(褚 저수량(褚遂良),우(虞 우세남(虞世南), 설(薛 설직(薛稷), 안(顔 안진경(顔眞卿), 유(柳 유공권(柳公權), 손(孫 손건례(孫虔禮), 양(楊 양응식(楊凝式), 서(徐 서계해(徐季海), 이(李 이옹(李邕). 여러 사람들의 쓴 글씨가 하나도 황정· 악의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 황정· 악의로부터 입문하지 않은 것을 입증할 만하며 다만 여러 북비와는 인과 인이 서로 합할 뿐만 아니라 방경(方勁)하고 고졸(古拙)하여 모릉(模綾)이 원숙한 것은 없다.

주 
朴蕙百-추사에게 서도를 배운 듯한 청년. 자세히는 그 행장을 알 수 없다.
撥鐙-집필법의 하나, 가장 보편적인 집필 법.
漢魏-한나라와 북위의 시대
分行-분항. 문장의 항렬을 나눔.
布白-글자가운데 있는 포백과, 글자마다 그 사이에 있는 포백과, 글 줄 사이에 있는 포백으로 획간, 자간, 장(章)구간의 여백. 이러한 간격의 여백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
遡鐘索-종요와 삭정의 시대 서법으로 소급함.
北碑-육조의 북위비. 
樂毅論-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 장군 악의(樂毅)에 대한 인물론으로서 위나라 하후현(夏後玄)의 작. 동진(東晉)의 왕희지가 쓴『악의론』은 양(梁)나라 내부 소장의 진필적에 따라 모본이 만들어짐. 수나라 지영은 왕희지의 정서(해서)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라 칭찬하였고 당나라 저수량(褚遂良)의『왕희지서목』에서도 정서 제1로 꼽고 있음. 본문 42행, 표제 1행.『여청재첩』본의 말미에는 ‘영화(永和) 4년(348) 12월 24일 서부관노(書付官奴, 관노는 왕헌지)’라 쓰여 있음.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왕희지가 돌에 친서하여 당 태종이 그것을 완상(玩賞)해서 소릉(昭陵)에 순장되었다가 나중에 그 잔석(殘石)이 세상에 나와 송나라 고신(高紳)이 입수했다 함. 끝 줄의 몇 자가 지워져서「海」자로 끝나므로「해자본(海字本)」이라고도 불림.
黃庭經-중국 동진(317~420)시대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2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2
원문
近日我東所稱書家 所謂晉體蜀體皆不知有此 卽取中國所已棄之笆籬外者 視之與神物. 奉之如圭欲以腐鼠嚇<꾸짖을 혁>鳳 寧不可笑. 
*臬-말뚝 얼嚇-꾸짖을 혁
근일에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서가의 이른바 진체(晉體)니 촉체(蜀體)니 하는 것은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며 곧 중국에서 이미 울 밖에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가 신물(神物)과 같이 보고 규얼(圭臬)과 같이 받들며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새를 쪼으려 든다[腐鼠嚇鳳]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蕙百云 以此秋史所論觀之 前日所習聞於鄭李諸人者 皆南轅北轍也. 
余曰非鄭李諸人之過 鄭李諸人 皆有天分 僻處窮廬 未見古人善本 又不取正於有道大方之家 俱是甕牖繩樞. 見聞無多 其爲學之苦心 有不可遏截 依希求影 怳惚模馨 以爲天上玉京 瓊樓金闕 必應如此如此 不能目見足到 何以證實於瓊樓金闕耶. 

혜백은 말하기를 "이 추사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전일에 정(鄭)·이(李) 여러 사람에게 익히 들었던 것은 모두 남원(南轅)에 북철(北轍)인 격이 아니겠소?" 하므로 나는 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이 여러 사람들의 허물이 아니다. 정·이 여러 사람들은 다 천분(天分)은 지녔지만 궁려(窮廬)에 묻혀 있어 옛사람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했으며 또 유도(有道)의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취정(取正)하지 못하고 모두 옹유승추(甕牖繩樞)로서 많이 보고 많이 들은 것은 없으나 그 학을 하는 고심(苦心)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림자만 찾고 황홀하게 소리만 어루만져서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천상(天上) 옥경(玉京)의 경루(瓊樓) 금궐(金闕)도 반드시 응당 이렇고 이러리라." 하며 능히 눈으로 보고 발로 가지는 못했으니 어떻게 경루·금궐의 실상을 증명할 수 있으랴.


曺娥碑-역시 왕희지 필체의 행초 비(碑). 
閣帖-중국, 송대의 법첩(法帖) 10권.『순화비각법첩』(淳化秘閣法帖)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각첩』이라고도 한다. 북송 순화3년(992) 태종의 명에 의해, 한림시서(翰林侍書)인 왕저(王著)가 내부(內府) 소장인 서적(書跡) 중 뛰어난 것을 골라 징심당지(澄心堂紙)와 이정규먹(李廷珪墨)을 사용한 모륵(模勒). 제왕(諸王), 대신, 이부(二府)의 장관에게 각각 한 질씩 하사했다. 제1권은 역대제왕, 제2·제4권은 역대명신, 제5권은 제가(諸家)고법첩, 제6~제8권은 왕희지, 제9, 제 10권은 왕헌지(王獻之)의 각첩(各帖)을 수록했다. 최고(最古)의 법첩이지만 원래의 탁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송대에 이미 『강첩』(絳帖),『담첩』(潭帖),『대관첩』(大觀帖),『정첩』(鼎帖),『여첩』(汝帖)외에 수많은 번각본(翻刻本) 또는 유각본(類刻本)이 만들어졌다. 왕착(王著)의 선택 안목이나 각수(刻手)의 실수 등에 대하여 미불(米芾)이나 황백사(黃伯思) 등의 비판도 있다. 명대에도『고씨본』(顧氏本),『반씨본』(潘氏本),『숙부본』(肅府本) 등의 번각이 이루어져서, 권위 있는 집첩(集帖)으로서 그후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존중되고 영인본의 종류도 많다. 건륭 34년(1769), 필사안(畢士安)에게 하사한 것을 바탕으로 우민중(于敏中) 등이 칙명에 의하여 표제나 배열을 정정하여 석문(釋文)을 붙인『흠정중각순화각첩』(欽定重刻淳化閣帖)은 학술적 성과의 집대성이다. 연구서는 많으나 청나라 왕주(王澍)의『순화비각법첩고정』(淳化秘閣法帖考正)이 뛰어난다.
王著(왕착)-송(宋)의 성도(成都)인. 자는 지미(知微),글씨를 잘 썼으며 필적이 심히 아름다웠고 감식력이 뛰어났으므로 태종이 비각진장의 고금서적을 변정(辨定)하여 법첩 10권을 번각(飜刻)케 하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순화각첩이다.
紕繆-*紕-의복의 가선 비
米元章-중국 명(明)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 한족(漢族)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3

答朴蕙百問書(답박혜백문서)3
원문
昔東坡贊羅漢伏虎之句 有云一念之差 墮此 . 導師悲憫 爲如嚬歎 以爾猛烈 復性不難 諸君 皆於一念之差 未免墮趣 然其猛烈者 亦復性不難 特未遇導師之悲憫 仍與大笑 究其實 實非鄭李之過 是不可責備耳. 至於圓嶠筆訣 最不可爲訓者. 爲伸毫法 尤是乖 積非勝是 欲盡空歐褚諸人 而上接鐘王 是不由門逕直躡堂奧 其可得乎.  盭-어그러질 려-戾

옛날 동파(東坡)가 나한복호(羅漢伏虎)를 찬한 글귀에,
일념의 차로써 / 一念之差
이 비이에 떨어졌네 / 墮此髬髵 *髬-갈기 일어설 비, 髵-갈기 일어설 이.
도사가 연민히 여겨 / 導師悲憫
너를 위해 빈탄하도다 / 爲汝嚬歎
너 같은 맹렬로서 / 以爾猛烈
본성 찾기 어렵지 않네 / 復性不難
라 하였으니, 제군들도 다 일념의 차로써 타락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렬한 것도 역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특히 도사의 비민(悲憫)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하고서 서로 크게 웃었다. 그 실상을 헤아려 보면 실로 정·이의 허물이 아니니 이는 책비(責備)만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원교(圓嶠)의 필결에 이르러는 가장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터럭을 편다는 법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더욱더 틀려나가서 그른 것이 쌓여 옳은 것을 이길 작정으로 구·저 여러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위로 종·왕(鍾王)에 접속하려 드니 이는 문 앞길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방 아랫목을 밟겠다는 격이라, 그것이 되겠는가.

趙子固云 學晉 不由唐人 多見其不知量也. 入道於楷有三 化度,九成,廟堂三碑耳. 子固之時 豈無樂毅黃庭 以此三碑爲言耶. 

조자고(趙子固)는 말하기를 "진(晉)을 배우려하면서 당 나라 사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 없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길이 셋이 있으니 화도(化度)·구성(九成)·묘당(廟堂)의 세 비(碑)일 따름이다."라 했으니, 자고(子固)의 때에 어찌 악의·황정이 없어서 이 세 비를 들어 말했겠는가. 때문에 악의·황정은 유식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此所以樂毅黃庭 有識之所不道耳. 
黃庭 尙有六朝人所書眞本 人皆見之 若欲臨此 直不過偶一戱墨試之而已. 是其可以 爲立法正宗也. 且黃庭眞本 筆勢飄飄輕揚 與近日所行墨刻 不特大異而. 如氷炭薰之不相合. 是何以謂之晉體 家戶戶祝也.
황정은 오히려 육조 사람이 쓴 진본이 있어 사람이 다 볼 수 있으니 만약 이를 임서하고 싶으면 바로 우연히 한번 희묵(戲墨)으로 시험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며 이 어찌 법을 세우는 정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황정의 진본은 필세가 가볍게 드날려 근일에 행세하는 묵각(墨刻)과는 특별히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빙탄(氷炭)과 훈유(薰蕕)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여 진체(晉體)라 일러 집집마다 떠받드는지 모를 일이다.

黃伯思-1079(북송 원풍2)~1118(정화 8)대의 인물. 중국 북송의 학자, 서가. 자는 장예(長睿), 호는 운림자(雲林子). 복건성 소무(昭武)의 사람. 원부 3년(1100)의 진사로, 관은 비서랑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하고, 경학, 역사, 제자백가 등을 널리 배웠다. 특히 고대의 문자를 좋아하여, 은(상). 주 ∙ 진 ∙ 한의 고기물의 관식(款識)의 연구로서는 당대 제1인자였다. 서는 어느 서체고 잘하였으며, 그의 척독(尺讀)이 진중되었다고 한다. 저에는 『동관여론(東觀余論)』이 있다.
董廣川-동유(董逌) , 송나라 동평(東平)사람, 자는 언원(彦遠), 호가 광천(廣川)이다. 정강(靖康) 말년(1127)년에 사업(司業)벼슬을 지냈다. 
歐褚虞薛顔柳孫楊徐李-구양순, 저수량, 우세남, 설직, 안진경, 유공권, 손과정, 양응식, 서호, 이옹. 
晉體蜀體-왕희지의 서체와 촉나라 조맹부의 서체. 
鄭李-정영철과 이광사.
南轅北轍-남쪽 지방의 수레 옆 가름대와 북쪽 지방의 수레 바퀴라는 뜻이니 거리가 상거하여 필법의 차이가 잇음을 말 한 것.
甕牖繩樞-깨진 옹기의 아가리로 창을 만들고 새끼로 문지도리를 얽어 만듦. 매우 가난함을 이르는 말.
圓嶠筆訣-원교 이광사의 필법이론서인 ‘서결’(書缺). 
鐘王-종요와 왕희지.

再論圓嶠論谷書(재론원교논곡서)
원문
嘗見李圓嶠 論斥山谷書 不有餘 卽不過掇拾晁美叔之言 不知美叔此說 已爲山谷所勘破也 槩論之 東人無處不妄自尊大 如圓嶠 直欲超越唐宋六朝 徑闖山陰棐几 是不知屋外有靑天耳 

일찍이 이원교(李圓嶠)가 황산곡의 글씨를 여지없이 논척(論斥)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곧 조미숙(晁美叔)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며 미숙의 이 말이 이미 산곡에게 감파(勘破)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개 논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고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원교마냥 곧장 당·송·육조를 뛰어넘어 지레 산음의 비궤(棐几)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바로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다.

圓嶠十駕不及石峯安平 石峯安平 又十駕不及董玄宰 玄宰又當十駕 不及於東坡山谷 顧何以妄論山谷也 圓嶠書何嘗有山谷一波折之法耶. 若云 圓嶠不知波折 人必大駭而實不知波折之五停古法耳.

원교는 십가(十駕)로도 안평(安平)·석봉(石峯)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안평·석봉은 십가(十駕)로도 동현재(董玄宰)에게 미치지 못하고 현재는 또 십가(十駕)로도 동파(東坡)와 산곡에게 미치지 못할 터인데 그런 처지로서 어떻게 함부로 산곡을 논한단 말인가. 원교의 글씨는 어찌 일찍이 산곡의 파절(波折)의 법만이라도 지녔던가. 만약 원교가 파절을 모른다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랄 터이지만 실상은 파절의 오정(五停)하는 고법을 모른다.

 주
圓嶠-이광사. 1705(숙종 31)∼1777(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내용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진도로 귀양 가서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畫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畫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그러나 추사는 원교의 필법을 절하하는 한편 그의 악법의 끼친 영향을 개탄하였다.
山谷書-황산곡의 글씨. 산곡은 황정견[黃庭堅]의 호. 1045(북송 경력 5)~ 1105(숭령 4)의 인물로 북송의 시인, 서예가. 송 4대가의 한 사람.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山谷), 부옹(涪翁). 장시성 홍주분령(洪州分零)사람. 치평 4년(1067)의 진사로, 5년 후에 북경 국자감교수가 되고 이사이 소식(蘇軾)과 친교. 원우원년(1068) 비서성에 들어가 『신종실록(神宗實錄)』을 편찬해, 집현교리(集賢校理)가 된다. 소성원년(1094) 장순(章淳), 채변(蔡卞)등에게 배척당하여 사천성 검주(黔州)와 융주(戎州)에 연이어 유배된다. 휘종조에 대사에 의해 소환되지만 다시 광서성 의주(宜州)로 유배되어 사망한다. 문인(門人)에게 문절(文節)선생의 시호를 받았다. 시에 있어서는 강서시파의 원조로 여겨진다. 서는 초서를 즐겨했는데, 처음은 주월(周越)에 사사받고, 후에 안진경, 만년에는 장욱(張旭), 회소(懷素)에게 배웠다. 
晁美叔-조단언(晁端彦). 송의 청풍(淸豊)인. 자는 미숙(美叔).문장 서법이 뛰어나서 조야에 으뜸이 되었다.
山陰棐几-왕희지의 고사에 나오는 비자나무 책상. 그가 쓴 책상위의 글자를 그의 필력의 깊이를 가늠하는 용어로 쓰인다. 
十駕-말 열 마리의 등에 멜 분량의 멍에, 아주 많은 양의 물건이나 노력을 비유한다.
石峯-한호. 한호[韓濩1543~1605] 조선 중기의 서예가. 한석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루는 서예가이며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능했다고 한다.《서경덕신도비》,《행주승전비》 등 비문이 주로 남아 있다



學習篆隸法(학습전예법)

學習篆隸法(학습전예법)
원문
吾輩學漢隸字 皆不免作唐隸 然唐隸亦難及 唐隸不止一明皇孝經而已. 漢碑所無之字 不可妄造 若於唐碑有之 尙可衣樣爲之 不如篆體之至嚴 篆字 決不可沿唐 雖李少溫 斷不可從耳.

우리들이 한예(漢隸)의 글자를 배웠다지만 모두 결국 당예(唐隸)를 쓰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당예도 미쳐가기 어렵다. 당예는 하나의 명황(明皇) 효경(孝經)에만 그치고 말 따름이 아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되며 만약 당비(唐碑)에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양에 의해 만들 수도 있으니 전체(篆體)와 같이 지극히 엄하지는 않다. 전자(篆字)는 결코 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니 비록 이소온(李少溫)의 전(篆)이라도 단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姜白石所藏定武蘭亭 爲趙子固落水本 蘇米齋手撫 無毫釐差訛 又爲姜開陽刻於山陰 蘭亭之於姜氏 大墨緣耳 

강백석(姜白石 강기(姜虁))이 수장한 정무난정(定武蘭亭)은 바로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이다. 
소미재(蘇米齋 옹방강(翁方綱)의 재호임)가 손수 모(摹)하여 호리(毫釐)의 차와(差訛)도 없다. 또 강개양(姜開陽)이 산음(山陰)에서 각을 했으니 난정이 강씨에게 있어 크나큰 묵연(墨緣)이라 하겠다.

 주
李少溫-이양빙(李陽氷)을 말 한다. 중국 당대 중기의 서예가. 자는 소온(小溫). 조군(화북성)사람. 벼슬이 장작감(將作監)이었으므로 이감(李藍)이라고도 불렀다. 전서를 잘 쓰고 진나라 이사(李斯)와 함께 ‘이이(二李)’ 라고 불렀다. 그 서풍은 격조가 높고 법이 갖추어 졌으며 경리호상(勁利豪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존 작품으로는 건원 2년(759)의『성황묘비』(중각)이 가장 빠르고 대표작에『삼분기』,대략 7년(772)에 『반야태 제기』, 만년인 건중원년(780)에『안씨가묘비』의 전액 등이 있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상세하고『간정설문(刊定說文)』30권을 만들었고 또 서법의 저서『한림금경(翰林禁經)』8권이 있으며 일부가 전해진다.
姜白石-강기[姜夔]를 말 한다. 1163 ~ 1203년의 인물. 중국 남송의 시인으로 자는 요장(堯章), 호는 백석도인(白石道人)이다.
定武蘭亭-여러 난정서의 본(本)중 가장 상위품으로 쳐주는 것이 구양순이 임서한 정무본(定武本)이다. 동진 묵제의 영화9년(353) 3월 3일 회계산음(저장성 소흥)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 41명이 모여 계추를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흥을 하고 시흥에 젖었다. 그때 지은 시집의 서를 왕희지가 썼고 옛날에는『임하서(臨河序)』라고 하였으나 지금은『난정서』라고 하며 또『계첩(稧帖)』이라고도 한다. 

論二王書(논이왕서)1

論二王書(논이왕서)1
원문
書家 必以右軍父子爲準則 然二王書 世無傳本 眞迹之尙存 惟快雪時晴與太令送梨帖 都計不過百字 千載之下 追溯棐几家風 止此而已. 亦皆入內府 非外人所可見.

서가(書家)는 반드시 우군의 부자(父子)를 들어 준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왕(二王)의 서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없으며 진적으로 상기 보존된 것은 쾌설시청(快雪時晴)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백자(百字)를 넘어가지 않으니 천재(千載)의 아래에 있어 비궤(棐几)의 가풍을 추소(追溯)할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이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가서 외인으로는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如劉摹章刻 尙是一翻者 摹法刻法 已不及宋元 又何論於粱摹唐刻也. 

유(劉)씨(명말 각자의 천재 劉雨若)나 장(章)씨(명나라의 각자 章藻功)의 각(刻) 같은 것은 오히려 한번 번모(飜摹)한 것으로서 모법(摹法)이나 각법(刻法)이 송/원 시대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또 어찌 양모(梁摹) 당각(唐刻)을 상대하여 논할 수 있으랴.

주-유(劉)씨(명말 각자의 천재 劉雨若)나 장(章)씨(명나라의 각자 章藻功)

六朝碑版 頗有傳本 歐褚皆從此出 然宋元諸公. 無甚稱道者 以其二王眞書 猶未盡泯如今時也. 今人當從北碑下手 然後可以入道耳 焦山鶴銘 卽六朝人書 又如鄭道昭諸石刻 皆可觀 如黃山谷 屢及焦山 而未嘗擧鄭 亦可異.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傳本)이 있어 구·저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송·원(宋元)의 여러 분들이 그다지 칭도(稱道)함이 없는 것은 그 이왕(二王)의 진적이 지금과 같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땅히 북비(北碑)로부터 하수(下手)해야만 제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초산명(焦山銘)·예학명(瘞鶴銘)은 곧 육조 사람의 글씨이며 또 정도소(鄭道昭)의 여러 석각 같은 것도 다 볼만하다. 황산곡(黃庭堅) 같은 이는 자주 초산(焦山-예학명)은 언급했지만 정(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樂毅論之梁摹唐刻 己自北宋時絶罕 近世所行俗本 是王著書也. 東人 尤無鑑別 認以棐几眞影 童習自紛 竟不覺悟 如蔡九峰所傳書古文 皆不知爲梅僞也.

악의론(樂毅論)의 양모·당각(梁摹唐刻)은 이미 북송(北宋) 시대부터 대단히 드물었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속본(俗本)은 바로 왕저(王著)의 글씨이다. 동쪽 사람들은 더욱이 감별이 없어서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으로 인식하고 아이 때부터 머리가 하얗토록 익혀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마치 채구봉(蔡九峯, 채 침(蔡沈)이 전(傳)을 한 서경(書經)의 고문(古文)은 다 매색(梅賾)의 위본(僞本)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右軍父子-아버지인 왕희지와 아들인 왕헌지. 둘 다 역대 명필로 추앙됨.

王-왕희지와 아들인 왕헌지. 
快雪時晴帖-왕희지의 첩 중 하나. 각수(刻手)는 유우약(劉雨若)으로 각이 정교하며 이 첩 중에서도《쾌설시청첩《난정서(蘭亭序)》, 조자앙(趙子昻)의《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 서첩은 초탁(初拓)인 탁탁(涿拓) ·건탁(建拓) ·내탁(內拓)의 세 종류가 있다. 
送梨帖-왕희지의 첩 중 하나.  
棐几-비궤는 왕희지 고사에 나오는 일화의 책상. 
歐褚-구양순과 저수량.
焦山鶴銘-예학명(瘱鶴銘). 중국 육조시대의 마애각석(刻石).양(梁)의 천감13년(514), 강소성 단도현 동쪽에 있는 장강(長江) 가운데의 초산(焦山) 서남쪽, 관음암좌 아래의 절벽에서 학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것을 묻은 뒤 기념하기 위하여 각석을 했다. 그러나 후에 낙뢰로 파열되어 강속으로 떨어졌다. 가을, 겨울의 강물이 줄었을 때 찍은 탁본은『수전본(水前本)』이라 부른다. 북송시대 황정견(黄庭堅)은 왕희지(王羲之)의 작품이라 하여 그 서풍에 경도하였으며 황백사(黄伯思)는 도홍경(陶弘景)의 작품이라 하였고 동유는 상황산초(上皇山樵)의 것이라 하였으나 도홍경의 설이 유력하다. 왼손잡이 글씨체로 썼으며 서풍이 늠름하여 속세를 초월한 느낌이 있어 마애 중의 일품이라 한다.
鄭道昭-서예가. 북위 희평 1(516)년경. 중국 북위의 귀족. 자는 희백(僖伯). 호는 중악선생(中岳先生). 

論二王書(논이왕서)2

論二王書(논이왕서)2
원문
書畵一道 耳未聞畵家 必上探曹不興張僧繇 若得王右丞江干雪齋傳本 吳道玄菩薩天王毛筆 奉之如天球弘璧 如宋之燕文貴易元吉 爲稀世之寶 元之四大家<倪瓚,吳鎭,黃大癡,王蒙>亦難得其眞本 雖明之沈石田(沈周),劉完庵(劉珏),文衡山(문징명),董香光(동기창)之至近 而視同金科玉條 書則不然 必以鍾王爲準 非是輒皆忽之.

서와 화(畫)는 도가 한 가지이다. 화가가 반드시 위로 조불흥(曹不興)장승유(張僧繇)만 찾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의 강간설재(江干雪霽) 전본(傳本)이나 오도현(吳道玄)의 보살천왕(菩薩天王) 모필(摹筆)을 얻는다면 받들기를 천구(天球)와 홍벽(弘璧)같이 한다. 송의 연문귀(燕文貴)와 역원길(易元吉)의 것 같은 것도 세상에 드문 보배로 삼으며 원의 사대가(四大家) 조송설(趙松雪) 예운림(倪雲林) 황대치(黃大痴) 왕몽(王蒙)를 말하더라도 역시 그 진본은 얻기 어렵다. 

비록 명의 심석전(沈石田)·유완암(劉完庵)·문형산·동향광 같은 지극히 가까운 시대 사람들의 작품도 보기를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하는데 글씨만은 그렇지 아니하여 반드시 종·왕을 준칙으로 삼으며 이것이 아니면 선뜻 다 경홀히 여긴다.

如歐褚皆晉人神髓 而李圓嶠以方板眇之 謂之右軍不是書之科 不自覺其平生所習 乃王著書樂毅論也 董香光是書家一大結局 擧末倒之. 中國人以董臨蘭亭詩 入於蘭亭八柱帖內 有若嫡派眞脉之相傳 東人眼光 有甚過於中國賞鑑而然歟 多見其不知量也. 
若使圓嶠 低首向暢整敬客書學習 以其天品 溯歐褚之不難 又不必深加苛責也. 

무릇 구·저 같은 이는 다 진인(晉人)의 신수(神髓)인데도 이원교는 방판(方板)이라 칭하여 하찮게 여기며 "우군은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고 있으나 그 평생을 두고 익힌 것은 바로 왕저가 쓴 악의론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동향광은 바로 서가로서 하나의 큰 결국(結局)인데도 마구 말살하여 넘어뜨리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동이 임서한 난정시(蘭亭詩)를 난정의 팔주첩(八柱帖) 안에 꽂아 넣어 적파(嫡派) 진맥(眞脈)이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훨씬 중국의 감상가들 보다 나아서 그렇단 말인가. 너무도 요량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원교로 하여금 머리를 숙여 창정(暢整)이나 경객(敬客)의 글씨를 나아가 배우게 했다면 그 타고난 재주로 구양순이나 저수량에 거슬러 올라가기에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반듯이 너무 가혹히 책하여서도 아니 된다 할 것이다.


鄭道昭-서예가. 북위 희평 1(516)년경. 중국 북위의 귀족. 자는 희백(僖伯). 호는 중악선생(中岳先生). 영양 개봉(허난성) 사람. 중서령 정의(鄭義)의 막내아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서를 잘했다. 효문제 신하로서 국자제주(國子祭酒)가 되었고, 광주제군사, 평동장군, 광주자사, 산둥성 액현(掖賢)을 역임. 그후 낙양에 귀경하여 사망하였다. 액현 재임중 아버지, 정의의 비를 비롯해, 운봉산, 천주산, 태기산에 석각을 남겼다. 『정의하비』는 송의 『금석록』에 기재되어, 후대 청대 중기 완원(阮元)과 포세신(包世臣) 등에게 북위의 대표서로 극찬 받았다.
蔡九峰-채침(蔡沈), 채구봉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구봉산에 은거하였으므로 세인들이 그를 구봉선생이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채침은 복건성 건양사람, 자는 중묵(仲默), 주희 선생의 문하생이다. 평생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梅-梅賾(매색). 동진 서평인(西平人). 자는 중진(仲眞). 한의 무제 때 공안국의 고문상서를 얻어 바치었는데 모두 매색이 위조한 것이라 의심하였다.
曹不興-조불흥[曹不興]. 曹弗興이라고도 쓴다. 중국 삼국 오(222~280)의 화가. 오흥(吳興-저장성) 사람. 인물∙용을 특기로 했고 뛰어난 그림으로써 ‘오중팔절’의 한 사람으로 헤아려졌다. 한대 이후의 백화가 세련되어 제자 위협을 통해 고개지, 육탐미 등의 선묘법의 선구자가 되었고 후에 〈고고류사묘〉 창시자가 되었다.

論二王書(논이왕서)2

論二王書(논이왕서)2
원문
二王眞迹之至今尙存於中國者 有若右軍快雪時晴袁生等帖 大令之送梨帖 皆尋常閱過 尋常摹習 又如虞摹蘭亭 褚本蘭亭 馮之蘭亭 陸之蘭亭 開皇蘭亭 東人何嘗夢及 不知此個道理 一以迷誤不返 執三錢鷄毛 動稱晉體 竟過何本 不過是王者樂毅論耳. 寧不可歎.

이왕(二王)의 진적으로 지금도 오히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우군(右軍)의 쾌설시청(快雪時晴) 원생(袁生) 등의 첩(帖)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같은 것인데 이런 것도 그들은 다 심상(尋常)히 거쳐 가고 심상히 모습(摹習)하는 터이며 또 우모난정(虞摹蘭亭)·저본난정(褚本蘭亭)·풍(馮)의 난정·육(陸)의 난정·개황난정(開皇蘭亭)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꿈엔들 이에 미쳤으랴.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한결 같이 미오(迷誤)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삼전(三錢)의 계모필(鷄毛筆)을 견집하여 걸핏하면 진체(晉體)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하는 진체는 과연 무슨 본(本)인가 하면 왕저의 악의론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랴.

偶閱孫過庭獅子賦 林藻深慰帖 不覺神飛仍書 孫林卽晉人規則也 欲學艸法 不由孫之門逕 又是村肆酒壁一鎭宅符之惡札耳.

우연히 손과정(孫過庭 손건례 (孫虔禮))의 사자부(獅子賦)·임조(林藻)의 심위첩(深慰帖)을 펴보고 저도 몰래 신이 나서 한번 써 보았는데 손·임은 곧 진인(晉人)의 규칙이다. 초법(草法)을 배우고자 하면서 손의 문경(門逕)을 말미암지 않으면 또 촌구석 가게에나 술집 바람벽에 붙이는 하나의 진택부(鎭宅符)의 악찰(惡札)이 되고 마는 것이다.


張僧繇-중국 양(梁)나라 화가. 장쑤성 오의 사람. 양 무제(재위 520~549) 때에 활동. 도석 인물화에 능하고 사원에 많은 벽화를 그렸다. 귀족, 서민, 중국인, 외국인도 절묘하게 그려냈고, 서방 전래의 철선화와 음영법을 사용해서 요철화(凸凹畫)라 부르는 장식화를 그렸다고 한다.
王右丞-왕희지.
吳道玄-중국 당대의 화가. 양적(陽翟, 허난성 우현(愚縣))사람, 초명은 도자(道子). 후에 현종(玄宗)의 명으로 도현(道玄)이라 개명. 오생(吳生)이라 통칭된다. 관은 영왕(寧王)의 우(友)에 이르렀다. 처음에 서(書)를 장욱(張旭), 하지장(賀知章)에게 배웠으나 진전이 없어 그림으로 전환했다. 소요공위사립(逍遙公韋詞立, 654~719)의 소리(小吏)로서 촉(쓰촨성)에 있을 때 새로운 산수화풍을 창시했다. 현종의 눈에 띠어 궁정화가가 되어 인물, 불상, 신귀, 금수, 산수, 대전(台殿), 초목 등 모든 것에 뛰어나 불사도관(佛寺道觀)을 비롯해서 300여 간(間)의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元之四大家-명의 4대 유명 화가. 예찬,오진,황대치,왕몽(倪瓚,吳鎭,黃大癡,王蒙)
沈石田(沈周)-(1427~1509)-중국 명나라 때의 문인화가. 산수 ·화훼(花卉) ·금어(禽魚)를 즐겨 그렸으나,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남북의 화풍을 융합한 장중한 구성과 풍운(風韻)이 깃든 필치의 수묵담채화에는 일품이 많다. 40세 이후부터는 대소폭의 화면에 조지대엽 수법(粗枝大葉樹法)을 썼다고 하나, 대개 청명하고 투명하게 맑은 화면에는 반드시 낙묵준점(落墨皴點)을 썼다고 하는 말과 같이 점태(點苔)로 상징되는 활달함이 특징이다. 심석전(沈石田)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자 계남(啓南). 호 석전(石田) ·백석옹(白石翁). 장쑤성[江蘇省] 창저우[長州] 출생. 강남의 시화로 알려진 문인 가계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항(恒), 숙부 정(貞), 조부 징(澄), 동생 빈(豳)도 모두 그림에 능하여, 심주의 뒤를 이은 문징명(文徵明) 일족과 서로 비슷하다. 그는 처음에는 동원(董源) ·거연(巨然) ·이성(李成) 등의 화법을, 중년 이후에는 황자구(黃子久)의 화법을 터득하였고, 만년에는 오진(吳鎭)에게 심취하였다고 한다. 
劉完庵(劉珏)-자는 정미(廷美), 호는 완암(完庵), 두경(杜瓊), 심정(沈恒), 심항. 1410(명 영락 8)~1472(성화 8)년 때의 인물. 시서화에 뛰어났으며 산수화는 왕몽의 영향을 받았고, 동원, 거연(巨然)의 기풍도 있다고 한다.

論二王書(논이왕서)3

論二王書(논이왕서)3
원문
潁井王文惠二本 蘇齋不甚許可 此必蘇齋正法眼 可以審定 淺人又無以妄論矣. 
영정본(穎井本)·왕문혜본(王文惠本)은 소재(蘇齋)가 그다지 허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소재의 정법안(正法眼)만이 심정(審定)할 바이며 얕은 사람으로는 또 망령되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商邱陣氏宋拓舊本 芸臺以爲定武原石 蘇齋以爲宋翻 蘇齋之精確 當具特識 非凡眼所能透到也. 
상구진씨(商邱陳氏)의 송탁구본(宋拓舊本)은 운대(芸臺)가 이것을 정무(定武)의 원석(原石)이라 하였고 소재(蘇齋)는 송의 번본(飜本)이라 했으니 소재의 정확은 마땅히 특식(特識)을 갖추어 범안(凡眼)으로는 능히 뚫고 갈 바가 아니다

芸臺嘗刻古木蘭院本二石 一置古木蘭院 一置文選樓家塾 錢梅溪泳 刻趙吳興十三跋 是未燼前完本矣.
운대는 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을 두 돌에 각하여 하나는 고목난원에 두고 하나는 문선루(文選樓)의 가숙(家塾)에 두었으며 전매계(錢梅溪) 영(泳)은 조오흥(趙吳興 조맹부(趙孟頫))의 십삼발(十三跋)을 각했는데 이는 불에 타지 않은 이전의 완본이다.

趙子固落水本 爲蔣氏家物 蘇齋借留齋中 平生用力在是 近聞亦入內府矣. 趙吳興十三跋 已燼殘見爲英煦齋所收 亦經蘇齋品定.
조자고의 낙수본은 장씨(蔣氏)의 집 물건이 되었는데 소재가 빌려다 재중(齋中)에 두고 평소에 공력들인 것이 이에 있었다. 근자에 들으니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갔다 한다. 조오흥(趙吳興) 십삼발의 이미 타다 남은 것은 현재 영후재(英煦齋)에 소장되어 있는데 역시 소재의 품정(品定)을 거친 것이다.

文衡山-문징명. 문징명[文徵明] 1470.11.6(명 성화 6)~1559.2.20(가정 38)때의 인물로 명대 중기의 문인, 서가, 화가. 초명은 벽(壁), 자는 징명(徵明), 후에 자를 징중(徵仲)이라 고쳤다. 호는 형산(衡山), 정운생(停雲生)등. 오현(장쑤성 소주)의 사람. 부친 문림(文林)은 성화8년(1472)의 진사로 온주지부(溫州知府)까지 이르렀다. 시문은 오관(吳寬)에게, 서(書)는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우고, 재능이 있어 ‘시화삼절’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과거시험에는 10번이나 실패했었음. 가정2년(1523), 세공생(歲貢生)으로서 경사(京師)로 나아가 한림대조(翰林待詔)가 되어『무종실록(武宗實錄)』의 편집에 종사했으나 가정 5년 겨울에 귀향. 이듬해, 옥경산방(玉磬山房)을 지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서는 모든 체(體)에 능했으며 처음에는 왕희지(王羲之)풍을, 만년에는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 그 주려(週麗)한 서풍은 일세를 풍미하고 만년에도 또 승두(蠅頭)의 소해(小楷)를 쓰고 정절(精絶)을 극했다. 
方板-모난 형태.
董香光-동기창. 동기창[董其昌] 1555(명 가청 34) ~ 1636.11.11(승정 9)때의 인물로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 화가. 자는 현상(玄常). 호는 사백(思白), 향광(香光)이라 불리웠다. 화정( 상하이시 송강 )사람. 만력 17년(1589)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 황태자의 강관(講官)이 된다. 그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다시 관직에 들어가기도 함을 수차 반복하였다. 태창 원년(1620) 태상소경, 천경2년(1622) 태상사경겸 시독학사, 『신종실록(神宗實錄)』 편집에 참가하여 동 3년 예유시랑, 이어서 좌시랑, 동 5년에는 남경 예부상서를 지내고 다음해 은퇴. 숭정 4년(1631) 옛 관직에 복직, 동 8년에 예부상서겸 태자태보로 끝난다. 시호는 문민(文敏), 서화에 능하고 고금의 명필을 연구하였으며 또 선리(禪理)를 시문서화(詩文書畵)의 이론을 응용하여 설하였다. 서는 처음에 미불(未芾)을 종(宗)으로 하였고, 진나라 사람의 평담 자연의 경을 이상으로 일가를 형성하였다. 형동(邢侗) 미만종(米万鍾) 장서도(張瑞圖)와 함께 ‘형장미동(邢張米侗)’이라고 불리었으며, 또한 ‘남동 북미’라고도 칭하였음.
鍾王爲準-종요와 왕희지의 글씨가 후학에 표준이라는 말. 
毆褚-구양순과 저수량.
李圓嶠-원교 이광사. 
右軍-왕우군, 즉 왕희지.
快雪時晴帖-왕희지의 초서첩.
袁生帖-왕희지의 초서첩. 
大令之送梨帖-왕희지의 필체인 서첩

論二王書(논이왕서)4

論二王書(논이왕서)4
원문
晉宋之間 世重獻之書 右軍書反不見重 羊欣重子敬正隸書 世共宗之 梁亡以後 秘閣二王之書 初入北朝 眞僞淆集 唐時已難辨.

진(晉)·송(宋)의 사이에는 세상이 헌지(獻之)의 서를 중히 여기고 우군의 서는 도리어 중히 여기지 않았다. 양흔(羊欣)이 자경(子敬)의 정·예(正隸) 서를 중히 여겨 세상이 모두 존중하였던 것이다.

양(梁) 나라가 망한 이후로 비각(祕閣)에 수장된 이왕(二王)의 서가 처음으로 북조(北朝)에 들어가서 진위(眞僞)가 혼잡되어 당시에도 이미 분변하기 어려웠다.

陶隱居答梁武啓云 羲之從告靈不仕以後 略不復自書 有代書一人 世不能別 見其緩異 呼爲末年書 其實非右軍眞書 子敬年十七八 全傍此人書.

今二王書 一段如是難辨 進而讀經 守殘抱闕 不絶如線者 又豈一書家之可以比論乎 此學者所兢兢處耳. 衡方碑夏承碑上送 夏承碑原石 已不存 皆此重刻本通行耳.

도은거(陶隱居)가 양무제(梁武帝)에게 답한 계(啓)에 이르기를 "희지(羲之)가 선령(先靈)에 고하고 벼슬하지 않은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아니하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이 얼른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 느리고 다른 점을 보면 만년의 글씨라서 이렇다고만 했으나 그 실은 우군의 진서가 아니다. 자경이 나이 십칠팔 세에 전혀 이 사람의 글씨를 모방했다."고 했다. 지금 이왕(二王)의 글씨는 일단 이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운데 나아가서 경서를 읽으며 낡은 것만 고수하고 빠진 것을 안아서 끊어지지 않음이 실낱과 같은 것이 또 어찌 하나의 서가와 대비해 논할 수 있는 정도랴. 이는 학자로서 열백 번 신중히 생각해야 할 곳이다.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나아가지는 못한다. 형방비(衡方碑)·하승비(夏承碑)를 올려 보내는데 하승비의 원석(原石)은 이미 있지 않으며 이는 다 중각(重刻)한 통행본이다.


大令之送梨帖-왕희지의 필체인 서첩. 
褚本蘭亭-저수량이 임모한 난정서. 
開皇蘭亭-수(脩)의 개황연간에 쓴 난정본 중 하나.
孫過庭-서보의 저자 손견례. 초서의 성인이라 추앙 됨.
林藻-당나라 사람. 자는 위건(緯乾),초서를 잘 썼다 한다.
孫林-손과정과 임조.
村肆酒壁-향리의 술 주막 벽. 
鎭宅符-쓸모없는 글씨. 원래 진택부라는 말은 평안을 비는 부적인데 기둥이나 벽에 붙이었으므로 법식 없는 시골 속서(俗書)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蘇齋-옹방강. 옹방강[翁方綱-1733~1818] 청나라 법 첩학의 4대가로 꼽히는 금석학(金石學), 비판(碑版), 법첩학(法帖學)에 통달한 학자 겸 서예가. 시론(詩論)에서는 의리와 문사(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기리설(肌理說)을 내세웠다. 주요 저서에는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한석경잔자고(漢石經殘字考)》등이 있다.
1752년 진사가 된 뒤 광둥[廣東], 후베이[湖北], 산둥[山東] 등의 학정(學政)을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왔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찬수관(纂修官)을 지내고 내각학사(內閣學士)가 되었다. 서예는 당인(唐人)의 해행(楷行)과 한비(漢碑)의 예법(隸法)을 배워 유용(劉墉), 왕문치(王文治), 양동서(梁同書) 등과 함께 청나라 법첩학의 4대가로 꼽힌다. 경학(經學), 사학,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탁월한 감식력으로 많은 제발(題跋)과 비첩(碑帖)을 고증하였고, 시론(詩論)에서는 의리와 문사(文詞)의 결합을 주장한 기리설(肌理說)을 내세웠다. 주요 저서에《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한석경잔자고(漢石經殘字考)《초산정명고(焦山鼎銘考)《소미재난정고(蘇米齋蘭亭考)《복초재문집(復初齋文集)《석주시화(石洲詩話)》 등이 있다. 
芸臺-운대는 완원(阮元)선생을 가리킨다. 완원[阮元]선생은 1764(청 건륭 29)~ 1849(도광 29)년간의 사람으로 자는 백원(伯元), 호는 예대(藝臺), 뇌당암주(雷塘庵主), 연경노인(揅經老人), 이성노인(頤性老人) 등으로 불렀고 시호를 문달(文達)이라 했다. 강소성 의징(儀徵) 사람. 건륭 54년(1789)에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土)가 되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교육을 진흥하고 석학을 독려하며 『황청경해(皇淸經解)』,『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統校勘記)』 등을 편집하여, 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금석학에 관한 저서로『양석금석지(兩淅金石誌)』,『산좌(山左)금석지』,『적고재종정이기관식(籍古齋鍾鼎彛器款識)』이 있다.『연경보집』에 수록된 서론인『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北陣南帖論)』은 북비(비학파)의 서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순화각첩(淳化閣帖)』 이래의 이왕 절대관의 풍을 일변시켰고 후계자로 조지겸(趙之謙), 하소기(何紹基)등이 있었으나 자신의 서는 첩학파(帖學派)의 풍을 많이 따랐다.
錢梅溪泳-전영(錢泳), 전영[錢泳] 1759(청 건륭 24)~1844(청 도광 24)때의 사람.
청대 후기의 서예가로 자는 입군(立群). 호는 매개(梅溪). 강소성 금귀 사람. 모든 서체에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가 특징적이었다. 서풍은 연미(姸媚)를 넘어서나 뜻은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고인의 서예와 서각 등 100여 종을 모각했다 한다. 대표적인 법첩에『경훈당첩』,『이신제법서』가 있다. 저서로는『이원총화』가 있고, 한 당비의 많은 축본을 출판하기도 했다.
趙吳興-조맹부를 가리킨다. 그가 오흥(吳興)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英煦齋-청나라 만주 정백기인(正白旗人). 자는 정포(正圃), 호가 후재(煦齋)다. 옹방강의 제자로 금석 서화를 좋아하여 수장이 풍부하였다. 
晉宋之間-진나라와 송나라 연대의 사이 기간. 

羊欣-자는 경원(敬元), 370(동진 태화 5)~442(유송 원가 19)년 간의 인물. 중국 동진 말~유송(劉宋)의 서가. 자는 경원(敬元). 태산남성(泰山南城, 산둥성 태안〔泰安〕) 사람. 소시적 부터 용자 수려하고, 경적(經籍)을 박람하여 풍부한 교양을 갖췄으며 또한 도교를 봉신했다. 동진 말기에 유유(劉裕)에게 불리어 그 휘하에 있었으나 송조 성립 후는 신안(안휘성 흡현〔歙縣) 태수가 되어 그곳의 풍경을 좋아하여, 제왕이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서는 왕헌지(王獻之)를 배웠고, 예, 행, 초서에 뛰어나 헌지 사후는 당시의 제 1인자로 추대되었다. 

子敬-왕헌지, 즉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王獻之].344(동진 건원 2)~386(대원 11).

동진(東晋)의 서예가. 자는 자경(子敬).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 아버지를 대왕(大王)이라고 부르는데 대해 소왕(小王)이라 불리웠다. 처음 주주부(州主簿)의 비서랑(秘書郞)이 되었고 건위장군(建威將軍) 오흥태수(吳興太守)를 거쳐 만년에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다. 이어서 왕민(王眼, 왕흡의 아들)이 중서령이 됨으로 헌지를 대령(大令), 왕민을 소령(小令)이라 불렀다. 서예는 아버지에게 배웠는데 더욱 일기(逸氣)에 넘쳐 그의 성품은 남조사대부 사이에 유행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2왕이라 칭찬받다. 『순화각첩(淳化閣帖)』과 송∙명∙청의 집첩에 척독 60여점이 있고 소개(小槪)의 『낙신부 13행(洛神賦 十三行)』, 행서의『지왕탕첩, (池黃湯帖)』,『이십구일첩(廿九日帖)』, 초서의『압두환첩(鴨頭丸帖)』,『중추첩(中秋帖)』 등이 유명하다.

陶隱居-도홍경(陶弘景)을 말 한다. 452~536년간의 양나라 단양(丹陽)사람. 자는 통명(通明), 호를 화양은거(華陽隱居)라 불렀다. 풍모가 기이했으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음양 오행 지리 의약 등에 정통하였고 바둑 거문고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초서와 예서를 아주 잘 썼다고 한다. 구곡사중에 은거하면서 양무제의 자문에 응했으며 그래서 산중재상(山中재상)이라 일컬었다. 시호를 진백선생(眞白先生)이라 했다.

梁武-양나라 무제, 무제[武帝]는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502∼549)로 당시의 도읍 건강을 함락시켜 남제(南齊)를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했다. 이름은 소연(蕭衍). 묘호는 고조(高祖). 소연은 박학하고 문무에 재질이 있어, 남제(南齊)의 경릉(竟陵) 왕자량(王子良)의 집에서 심약(沈約)과 범운(范雲) 등 문인 귀족과 교유하여 팔우(八友)의 이름을 얻었다. 500년 옹주(雍州)의 군단장이던 소연은 남의 황제 동혼후(東昏侯)에 대한 타도군을 일으켜, 그 도읍인 건강(建康: 南京)을 함락시켜 남제를 멸망시키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불렀다. 무제의 치세는 50년에 이르는데, 그 전반은 정치에 정진했으나, 후반에는 그의 불교신앙이 정치면에도 나타나, 불교 사상에서는 황금시대가 되었지만 정치는 파국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548년에 일어난 후경(侯景)의 반란으로 병사하여 건강은 황야로 변했다. 

論白下書(논백하서)

論白下書(논백하서)

白下書 出於文衡山 世皆不知 且白下亦不自言 文書小楷赤壁賦墨搨一本 東出 白下專心學之 其短竪之上豊下穀處 卽其所得法 而文書淸婉勁利 白下微鈍差肥 且文之結構 皆合於歐褚顔柳相傳之舊式 白下皆漫書之 一字之內 逐其橫豎点捺 砌溱之 然其天品甚異 加之人工 終成一家數者 以其不以衡山卑近 而俯首學習 不以騖遠自大 如後來妄稱鍾王也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문형산(文衡山)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알지 못하며 우선 백하(白下) 자신도 또한 말하지 않았다. 문(文)의 글씨로서 소해(小楷) 적벽부 묵탑본(墨塌本)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백하가 전심하여 이것을 배웠다. 

그 짧은 수획(竪畫)의 위는 풍성하고 아래는 빤 것은 바로 문(文)에게서 얻어온 법인데 문의 서는 청완(淸婉)하고 경리(勁利)한 반면 백하는 살짝 둔하고 조금 살찌며 우선 문의 결구는 다 구·저(歐褚) 안·유(顔柳)의 서로 전하는 옛 식에 들어 맞는데 백하는 다 되는 대로 썼으며 한 글자의 안에서 그 횡(橫)·수(竪)·점(點)·날(捺)에 따라 늘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매우 특이한데다 인공마저 더하여 끝내 하나의 가수(家數)를 이룬 것은 형산을 비근하다 여기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 배우고 익히곤 하여 먼 데로 치달려 스스로 대단한 척하기를 근래의 종·왕을 망칭(妄稱)하는 사람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其大楷之金石碑版前面字 專法坡公表忠碑 其半艸 以米南宮爲歸 竝不出宋人圈子外 卽其識力 大有商量處 其門下得髓 以圓嶠爲第一 圓嶠初年所作楷字 卽與師門無少異 如一手 實不知但從師門所書學之 曾不一叩師門之所出 又何哉. 師門亦不告其所出 又何哉. 抑或師道甚嚴 不敢妄請歟. 師門之不以告者 卽又不示璞之義歟 

그 문하에서 진수를 얻은 사람으로는 원교를 제일로 삼거니와 원교의 초년에 쓴 해자는 곧 사문(師門)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솜씨와 같았다. 실상 모를 일은 단지 사문의 써낸 것에서만 배우고 일찍이 한번도 사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더듬어 보지 않은 점이니 이는 또 웬일이며 사문 역시 자기의 나온 바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또 웬일인가.

다시 생각하면 사도(師道)가 너무도 엄하여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던 것이었던가. 사문이 일러주지 않은 것도 또한 박(璞)을 보여주지 않은 의에서였던가

白下用羊毫筆 徐丹陽嘗云 見師門所書中國大毫 白如雪 竟不知爲何筆 亦不敢請 盖古人師道之嚴 亦可見 徐李皆其高足 李又傳其筆 皆府之羊毫 雖知之 白下能使得 他皆筆性之所不合耳.

백하는 양호필(羊毫筆)을 썼던 모양이다. 서단양(徐丹陽)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문의 쓰는 붓을 보니 중국의 대호로써 희기가 눈 같은데 끝내 무슨 붓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끝내 청해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대개 옛사람은 사도(師道)가 엄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이(徐李)는 모두 그 고족(高足)이며 이(李)는 또 그 필법마저 물려받았으나 모두 양호인지는 알지 못했으며 비록 알았다 해도 백하는 능히 부려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필성(筆性)으로 보아 맞지 않을 것이다.
豹菴書 卽出於褚河南 亦不言所自如白下 古人多如是處. 

강표암(姜豹庵) 글씨는 바로 저하남(褚河南)에서 나왔으나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백하와 같으니 옛사람들은 이와 같은 곳이 많았다.


白下-윤순[尹淳]의 호이다. 1680년 ~ 1741년의 인물로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학음(鶴陰). 만년에는 만옹(漫翁)이라 하였다. 
윤순은 시문은 물론 산수·인물·화조 등의 그림도 잘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역대서법과 중국서법을 아울러 익혀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다.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李匡師) 등이 배출되었다. 서풍은 왕희지(王羲之)·미불(米芾)의 영향이 많은데, 그의 필적을 보면 소식(蘇軾)체로 쓴 것도, 동기창(董其昌)체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阮堂集)』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文徵明)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이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다. 특히, 행서는 각가(各家)의 장점을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文衡山-문징명.
歐褚顔柳-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유공권 당대(唐代)의 명필 4인.
坡公表忠碑 -소동파의 표충비를 말 함.
米南宮-미불[米芾]을 가리킴. 남궁의 그의 호 중 하나다. 1051(북송 황우3) ~1107(대관 1). 북송의 서화가. 論米南宮書(논미남궁서) 주서(注書)참조.
徐丹陽-서무수(徐懋修-1716~?), 서무수는 대구 사람으로 자는 중욱(仲勗), 호는 수헌(秀軒).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의 아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손자. 벼슬이 단양부사에 그쳤는데 그래서 그를 추사는 서단양이라 부른 것. 부자가 모두 글씨를 잘 썼는데 백하 윤순의 문하에서 배우고 이광사(李匡師)와 함께 의발을 전수 받음.
徐李-서무수(徐懋修)와 이광사(李匡師).
豹菴-강세황[姜世晃] 1713년 ~ 1791년의 인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로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운 제자로서 김홍도(金弘道)·신위(申緯)가 주목된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서화평, 대나무 판각화, 사군자를 한 벌로 짝 맞추어 그리는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褚河南-저수량을 이르는 말이다. 당 고종 때 하남군공에 책봉되어 저하남이라 불리운다. 중국 당대 초기의 서가. 자는 등선(登善). 전당(저장성) 사람. 선조시대 때 남조를 섬겼고 아버지 제량은 진왕(태종{당})부 18학사의 한 사람, 수량은 그의 둘째아들. 처음 진주 도독부개조참군에서 차차로 올라 정관 10년(636) 비서랑에서 기거랑으로 올랐다. 정관 15년 간의대부가 되어 지기거사를 겸했다. 사관 ∙ 간관으로서 충실엄정했고 그후 중서령에 올라 태종의 신임을 얻어 붕어(崩御) 즈음에는 후사를 부탁받을 정도였다. 초당4대가의 한 사람으로 특히 해서가 훌륭해 설직, 설요 등 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완미한 서풍을 따랐다. 서적(書跡)은 『이관불감비』, 『맹법사비』, 『안탑성교서』 등이 유명하다.

論米南宮書(논미남궁서)

論米南宮書(논미남궁서)
원문
米南宮書 出於羅讓 而世但知米 不知有羅 蘭亭 一位歐摹 一爲褚臨 歐有歐體 褚有褚體 世但知爲山陰 而反不知是歐是褚 若以歐褚書爲言 雖歐成化度三龕聖敎 擧皆忽之 中國人未嘗如此 東人偏欲抹摋(지울 살)之 如宋元諸人 必欲鍼砭西京東京直爲超趣而上之 其實目未嘗見火度三龕) 公然虛喝以傲耳.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의 글씨는 나양(羅讓)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은 다만 미(米)를 알 뿐이요, 나(羅)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난정(蘭亭)은 하나는 구(歐)의 모본(摹本)이요, 하나는 저(褚)의 임본(臨本)으로서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다만 산음(山陰)의 것인 줄만 알고 도리어 이것은 구, 이것은 저임을 알지 못하며 만약 구·저의 서(書)를 들어 말을 하면 비록 구성(九成) 화도(化度) 삼감(三龕) 성교(聖敎) 저(褚)의 안탑성교(雁塔聖敎)를 말함)라도 모두가 경홀히 여긴다. 

중국 사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말살하려 든다. 이를테면 송·원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침폄(鍼砭)하려 들며 서경(西京)·동경(東京)으로 곧장 뛰어넘어 올라가려 하나 그 실상인즉 화도·삼감을 보지도 못하고서 공연스레 허세와 공갈로만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米以褚臨爲天下第一 其時 不少定武而必以褚重 米之鑑識 當有所參證 非後人淺量可測. 如黃山谷又表氣定武 姜白石趙彛齋 皆以定武爲眞 後世之動稱定武 亦以是耳 桑兪諸鑑賞 又不專以定武爲歸 竝擧褚本. 

미남궁은 저임(褚臨)을 들어 천하의 제일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무본(定武本)이 적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저(褚)를 중히 여겼으니 남궁의 감식(鑑識)은 의당 참증한 바 있어 뒷사람의 천량(淺量)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산곡(黃山谷) 같은 이는 또 정무본은 추켜들었으며 강백석(姜白石)·조이재(趙彝齋)가 다 정무를 진(眞)으로 삼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정무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세창(桑世昌),유송(兪松) 여러 감상가들은 오로지 정무를 제일로 삼지 아니하고 아울러 저본(褚本)을 들었다.

 주
米南宮-미불[米芾]을 가리킴. 남궁의 그의 호 중 하나다. 1051(북송 황우3) ~1107(대관 1). 북송의 서화가. 이름은 처음엔 불(黻)자를 쓰고, 41세 이후에 불(芾)을 썼다. 자는 원장(元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 양양만사(襄陽漫士), 또는 거소(居所)에 따라 해악(海岳), 관(官)에 의해 남궁(南宮)이라 부른다. 널리 진∙당 제명가의 서를 배웠으나 특히 진(晋)인의 풍운을 전하고, 송대 4대가의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그림은 동원(董源)에게서 배우고, 후세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하는 산수화법의 조형(祖型)을 만들어 문인화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 
羅讓-당나라 회계지방 사람. 글씨를 잘 써 미불(米芾)이 사숙(私塾)한 인물. 
姜白石-강기[姜夔]를 말 한다. 1163 ~ 1203. 남송의 시인으로 자는 요장(堯章), 호는 백석도인(白石道人)이다. 장시성 번양사람으로, 평생 관직으로 나가지 않고 강남 각지를 표박(漂泊)하며 범성대(范成大), 양만리(楊方里) 등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했다. 시사(詩詞)에 능하였으며 악률(樂律)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법서와 고기(古器) 감식에도 뛰어났고 그 수장(收藏)도 풍요하였다.

趙彛齋-조맹견[趙孟堅]을 말한다. 송(宋)나라 이종제(理宗帝) 무렵의 화가. 원(元)나라가 수립된 뒤에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여 시 ·서 ·화를 벗삼아 만년을 보냈다. 고결한 인격이 반영되어 운필의 엄정과 화취청경(畵趣淸勁)한 사군자화, 수선화 등을 그려 수묵백묘(水墨白描)의 《수선도권(水仙圖卷)》 등을 남겼다.자는 자고(子固). 호가 이재거사(彛齋居士). 송나라의 종실 출신으로 1226년 진사(進士)가 되고, 벼슬은 한림학사 ·엄주태수(嚴州太守)를 지냈다. 원(元)나라가 수립된 뒤에는 벼슬을 하지 않고, 저장성[浙江省]의 광천전[廣陳鎭]에 은거하여 시 ·서 ·화를 벗삼아 만년을 보냈다. 생활은 문인 ·사대부의 전형적인 행실을 보여준 수아박식(修雅博識)으로 일컬어졌으며 인격이 매우 고결하였다. 圖卷)》등을 남겼다. 서화가 조맹부(趙孟頫)는 그의 사촌이다. 
桑兪-상세창(桑世昌),유송(兪松). 남송 때 사람. 

論成親王書(논성친왕서)

論成親王書(논성친왕서)
원문
成邸書 從宋雪入 晩得歐化度碑宋拓舊本 稍變之 深入其奧 艸法 尤長於孫虔禮舊法 一洗惡札之鎭宅符俗習 可爲後民之式 此卷 盖多趙意 然不名一體 鍾王諸法 各得其妙 苦筍帖 爲其所收 內府藏秘晉唐來劇迹 皆其習熟而枕籍者 雖欲不書 得乎 東人之以不知來歷之閣帖蘭亭樂毅 欲直溯山陰正脉者 是三家冬烘 欲以高頭講章 傲召陵北海耳.

성저(成邸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는 송설(松雪)로부터 들어갔는데 늦게는 구(毆)의 화도비·송탁 구본을 얻어 차츰 변하여 깊이 그 ᅟᅩᆨ에 들었으며 초서의 법은 더욱 손건례(孫虔禮)의 구법(舊法)에 특장(特長)이 있어 악찰의 진택부(鎭宅符)의 속습을 깨끗이 씻어냈으니 족히 뒷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 이 권은 대개 조(趙)의 필의가 많지만 그러나 한 체로 이름 짓지 않고 종왕(鐘王)의 여러 법이 각각 그 묘를 나타냈다. 

고순첩(苦荀帖)은 그가 수장한 것이며 내부(內府)에 비장(秘藏)한 진,당 이래의 극적(劇迹)은 다 그가 익숙히 익혀 침자(枕藉)하던 것이니 아무리 잘 쓰고 싶지 않지만 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력도 알지 못하는 각첩(閣帖)·난정·악의를 가지고서 곧장 산음의 정맥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삼가촌락의 동홍(冬烘) 선생이 고두강장(高頭講章)으로서 소릉(召陵) 북해(北海)에게 버티고자 하는 것이다.

嘗於法源寺 見成邸所書刹那門三大字 有金翅劈海 香象渡河之勢 在東國 十石峯 不可當 若復石庵覃溪之雄强 又作何觀 不覺惘然.

일찍이 법원사(法源寺)에서 성친왕이 쓴 찰나문(刹那門)이라는 삼대자(三大字)를 보았는데 금시(金翅)가 바다를 가르고 향상(香象)이 바다를 건너가는 기세가 있어, 우리나라의 석봉으로는 열이라도 당해낼 수 없거니와 만약 다시 석암(石庵)·담계(覃溪)의 웅강(雄强)이라면 또 어떤 구경거리를 만들었을는지, 자신도 모르게 망연하게 된다.

白丁雲南僧 善寫蘭 每閉門獨畵 以水 噀(물뿜을손)其紙面 墨光騰發 人無利得其法 鄭板橋師之. 此鳳眼象眼通行之規 非此無以爲蘭 雖此小道 非規不成 况進而大於是者乎. 

백정(白丁)은 운남(雲南)의 중인데 난초를 잘 그렸다. 매양 문을 닫고 혼자서 그리며 물로써 그 지면에 뿜어 먹빛이 나는 듯이 피어나는데 아무도 그 법을 터득한 자 없고 오직 정판교(鄭板橋)만이 그것을 배웠다. 

이는 봉안(鳳眼)과 상안(象眼)으로 통행하는 법인데 이것이 아니면 난을 만들 수 없다. 비록 이것이 소도(小道)지만 법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아가 이보다 큰 것에 있어서랴.

是以一葉一瓣 自欺不得 又不可以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是以寫蘭下手當自無自欺始. 趙子固寫蘭 筆向左 蘇齋老人 屢稱之. 

靜悟靑綠三十年 以元人筆 運唐人氣韻 作宋人邱壑 筆端有金剛杵 如天馬行空 如天衣無縫 如神龍見首不見尾. 

그렇기 때문에 잎 하나 꼭지 하나도 스스로 속이지 못하거니와 또 남을 속여서도 안 된다.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것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이 때문에 난(蘭) 그림에 손을 대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속임이 없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자고(趙子固)가 그린 난은 한 획 한 획이 좌로 향했다. 소재노인(蘇齋老人)이 자주 칭했다. 정오(靜悟)는 청록(靑綠)을 연구한 삼십 년에 원인(元人)의 필로써 당인(唐人)의 기운을 운전하고 송인(宋人)의 구학(邱壑)을 만들었는데 붓끝에는 금강저(金剛杵)가 있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니는 것도 같고 천의(天衣)가 꿰맴이 없는 것도 같고 신룡(神龍)이 머리만 나타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成邸-성친왕[成親王]을 말 한다. 즉 성친왕 저하(邸下)라는 말이다. 1752(청 건륭 17) ~ 1824(청 도광 4)까지 살았던 청조의 중기~후기의 황족, 서가. 건륭제의 제11자. 명은 수성, 자는 경천, 호는 소엄, 즉제, 시호는 철. 건륭54년(1789) 성친왕에 봉해지고, 영시위대신이 됨. 건륭제의 학무 자질을 승계해서 조정의 예의전고에 밝음. 서는 첩학파 계통에 속하고 조맹부, 동기창의 수윤한 해서, 행서도 뛰어남. 역대의 명적을 임모한 『이진제모고첩』 가경제(1796~1820)의 소칙으로 상석한 『이진제모고첩』이 있고 문집에 『이진제집』이 있다.
宋雪-송설은 조맹부의 호. 원(元)의 유학자, 서화가. 이름은 맹부(孟頫), 호는 송설 도인(松雪道人). 그림은 남송 원체화를 부정하고 복고(復古)주의를 주창, 수묵화 외에 이공린(李公麟)의 선묘(線描)주의를 조술(祖述)하였다. 백묘화를 그리어 명,청(明淸) 시대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서는 왕희지(王羲之)의 복고주의를 표방, 진서,행서에 능했다. 그의 글씨체를 송설체라 부르며 조선의 중기 서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歐化度碑-구양순이 쓴 화도사비.
孫虔禮-손과정.
鎭宅符-쓸모없는 악찰을 이를 때 쓰는 표현이다.
鍾王諸法-종요와 왕희지의 모든 필법. 
苦筍帖-성친왕이 쓴 서첩. 
劇迹-매우 좋은 묵적, 즉 작품이라는 말.
枕籍-서로 이리저리 베개를 베고 질서없이 누워 잠, 적벽부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는 두서없이 이리저리 쓴 글이라는 말.
直溯山陰正脉-곧바로 산음의 정통 서파로 들어간다는 말이니 기초도 없이 노서를 흉내 내고자 하는 서가들을 이르는 말.
冬烘-시세에 어두운 촌의 서당 훈장. 생각이 진부하고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일컫는 말로 정훈(鄭薰)의 고사에서 연유함. 당(唐)의 정훈이 시험관이 되어 안표(顔標)가 안진경(顔眞卿)의 뒤인데도 잘못하여 장원이 된 것을 기롱(譏弄)한 말.
高頭講章-사리를 모르는 사람이 그저 목만 높이 치켜들고 소리내어 문장을 읽고 있다는 뜻. 
召陵-소릉[昭陵]은 하남성 언성현에 있는 춘추시대의 옛 지명. 제환공이 제후를 거느리고 초를 정벌하고 이곳에서 회맹하였다는 곳이다.
法源寺-당(唐)나라 645년에 착공하였고, 696년에 완성된 유서깊은 절. 
金翅-금시조, 바다를 가르고 용을 잡아먹는다는 인도의 전설상의 큰 새. 문체나 서법의 내용이 투철한 곳을 상징하는말.
劈海-바다를 가름. 
香象-푸른색의 향기를 띤 코끼리. 향상이 바다를 건널 때는 바다에서 강물을 차단하므로 평론이나 문사가 투철한 것을 향상(香象) 도하(渡河)라 부른다.
石庵-유용[劉墉] 청나라 때의 정치가·서예가. 유용의 호. 시문과 서법에 능했고 소해(小楷)·행서·초서에 뛰어났으며 풍려한 기골(氣骨)과 고상한 정취를 가진 독특한 서풍으로 유명했다. 진한 먹을 사용해 중후함을 표현했고 첩학파(帖學派)의 대성자로 존경 받았다. 자는 숭여(崇如), 호는 석암(石庵). 
覃溪-옹방강[翁方綱]의 호. 자는 정삼(正三)이다. 1733(청옹정11)~1818(가경23)의 인물. 순천부(북경) 대흥현 출신. 건륭 17년(1752)에 진사에서 내각학사에 올랐다. 경(經) ∙ 사(史) ∙ 문학에 넓은 지식과 박문과 정밀한 고증에 의한 업적이 많다. 특히 금석학, 비판(碑版), 법첩학에 관해 많이 알고 있으며 저서에 『양한금석기』, 『소재당비선』, 『소미제난정고』, 문집에 『복초제집외시(複初齋集外詩)』, 『집외문(集外文)』이 있다. 그외 서예는 비학파로부터 평가는 받지 못했으나 구양순, 우세남에 기인하는 근직 실후한 소해(小楷)에 특색이 있고 유용, 왕문치, 양동서와 함께 첩학파의 4대가로 꼽힌다.
白丁-중국 운남의 승려로 난을 잘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작업을 바밀리에 했지만 정판교가 이를 터득했다 한다.

鄭板橋-정섭[鄭燮 1693~1765] 자는 극유(克柔), 호가 판교(板橋). 江蘇省 興化 출생. 시(詩)·서(書)·화(畵) 모두 특색 있는 작풍을 보이며, 그림에서는 양주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736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어 한림(翰林)에 들어가 산둥성[山東省]의 판현[范縣]과 웨이현[濰縣]의 지사를 역임하였다. 웨이현 지사로 있던 1746년의 대기근 때 관의 곡창을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는데, 1753년 기근구제에 대하여 고관에게 거역하였다 하여 면직된 다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시는 체제에 구애받음이 없었고, 서는 고주광초(古籒狂草)를 잘 썼다. 행해(行楷)에 전예(篆隸)를 섞었는데, 그 사이에 화법도 넣어서 해방적인 독자적 서풍을 창시하였다. 팔분(八分)에 대하여 그의 서체를 육분반서(六分半書)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화훼목석(花卉木石)을 잘 그렸으며, 특히 뛰어난 것은 난(蘭)·죽(竹)으로서 상쾌한 감이 있는 작품이 많다.〈묵죽도병풍(墨竹圖屛風)〈회소자서어축(懷素自敍語軸)등의 작품과《판교시초(板橋詩鈔)《도정(道情)》등의 시문집이 있다. 

鳳眼象眼-난의 필법중 하나, 가지 잎이 교차하는 부분의 중심을 째는 기법을 파봉안이라 부름.

趙子固-조맹견, 조맹견의 자가 자고(子固).

蘇齋老人-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노수신의 호다. 을사사화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귀향살이를 하였다. 선조 즉위 후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가중처벌되어 진도(珍島)로 이배, 19년 동안 귀양살이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槐山)으로 옮겼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서 교리(校理)에 기용되어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의 공격을 받았으며, 휴정(休靜) ·선수(善脩) 등과도 교제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봉산서원(鳳山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소재집》이 있다. 

金剛杵-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불교 용구의 하나. 저(杵)는 인도 고대의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 금강저를 무기로 삼아 아수라의 무리를 쳐부순다고 한 신화에서 그 신비한 힘이 유래되었다. 그리고 인도의 여러 신과 역사(力士)들이 이 무기로써 적을 항복시킨다고 한다. 뒤에 밀교에서 적을 쳐부수는 의미로 이 무기를 불구(佛具)로 채용하여 여러 존상의 지물(持物)로서, 또는 수행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天衣無縫-선녀가 만든 옷은 꿰맨 자국이 없다, 하늘나라 사람의 옷은 솔기나 바느질한 흔적이 없다는 말로 詩歌(시가)나 文章(문장) 등이 기교의 흔적이 없어 자연스럽게 잘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 완전무결하여 흠이 없음을 이르는 말. 또는 세상일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의 순진성을 이를 때 쓰는 말.

墨法辨(묵법변)

墨法辨(묵법변)
원문
書家墨以第一 凡書之使毫 卽不過使毫行墨而已. 紙與硯 皆助墨以相發爲用者 非紙無以受墨 非硯無以潑墨 墨之潑者 乃墨華之騰采. 非止一段 善於殺墨也. 能煞墨 而不能於潑墨者 又非硯之佳者 必先得硯 然後可以作書 非硯 墨無所施. 紙之於墨 亦與硯相似 必須佳紙 迺爲下墨 所以寶墨 澄心 玉板 銅盞 宣牋 筆又其次耳

서가에서는 먹을 첫째로 여긴다. 대체로 글씨를 쓰는데 있어서 붓을 쓴다는 것은 곧 붓으로 먹을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와 벼루는 모두 서로 도와 서로 발현시키는데 쓰이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없이는 먹을 받을 수 없고 벼루가 없이는 먹물을 피어나지 못하게 된다. 먹이 발현한다는 것은 먹의 아름다움이 여러 빛깔로 피어나서 한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쇄묵(먹빛이 번짐이 없는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이다. 

먹빛을 번지지 않게 할 수는 있으나 먹물이 피어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은 또한 벼루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먼저 좋은 먹을 구한 후라야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할 것이니 벼루가 아니고서는 먹을 갈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종이의 먹에 대한 문제도 또한 비슷한 이치이니 반듯이 좋은 종이를 얻은 후에야 먹물을 내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먹을 보배롭게 하는데는 징심(징심당지),옥판(옥판선지),동전, 선잔이 있고 붓은 또한 그 다음이라 할 수 있다.

東人 秪於筆致力 全不知墨法 試看紙上之字 惟墨而已 此百姓日用 而不知也. 是以韋中將 亦以爲張芝筆 左白紙竝臣墨 又宋時 得李廷珪半丸 如千金. 見古人法書眞蹟 墨溜處 如黍珠突起 礙於指 可以溯墨法矣. 
是以古訣云 漿深色濃 萬毫齊力 卽竝擧墨法筆法. 而近日我東書家 單拈萬毫齊力一句 以爲妙諦 不竝及其上句之 漿深色濃 不知此兩句之 不可離開 是夢未到墨法 不覺其自歸偏固妄論.

우리나라 사람들은 붓을 아끼는데는 힘을 다하지만 먹을 쓰는 법은 전혀 알지 못 하고 있다.
 종이 위의 글자를 시험삼아 바라보면 먹 빛 뿐이니 이것을 사람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위중장은 또한 장지의 붓과 좌백의 종이와 아울러 신의 먹으로 써야 한다 고 말 하였고 또 송대에는 이정규의 반 토막짜리의 먹을 얻고도 천금같이 여기었다 한다. 

고인이 쓴 법서나 진적에서 먹이 맺힌 곳은 좁쌀알 같은 것이 손으로 만지면 돋아 있어서 진정 먹 쓰던 법을 거슬러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문에 옛 서법의 비결에 말 하기를 먹물이 많고 빛이 짙으면 모든 붓 털에 힘이 고루 가게 된다(만호제력)고 하였다.

 곧 먹 쓰는 법과 붓 쓰는 법을 아울러 거론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동인들의 글씨 쓰는 사람들을 보면 다만 모든 붓털에 힘이 고루가게 한다(만호제력)는 한 구절만을 들어서 신묘한 진리로 삼을 뿐 아울러 그 윗 구절인 먹물이 많고 빛이 짙다(漿深色濃)는 데에는 미치지 못 하고 있으니 이 두 구절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이치이다.

이렇게 하고서는 먹 쓰는 법에 도달함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것이며 스스로가 편벽되고 고루하며 망녕된 이론에 빠져듦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麗末來 皆偃筆書 一書之上下左右 毫銳所抹 毫腰所經 分其濃淡滑澁 以爲書 皆偏固. 其所云 濃淡滑澁 可論於墨法 而烏在其筆法之偃與不偃也. 混無別於墨法筆法 但以筆法擧擬 豈不偏固者耶. 良可慨矣.

고려 말 이래로 모두 붓을 뉘여서(偃筆) 썼다든가 한 글씨의 상하좌우나 붓 끝이 누른 곳과 붓 허리가 지나간 곳을 그 농담이나 매끄럽고 꺼칠한(濃淡滑澁) 것으로 나뉘어 글씨를 생각한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편벽되고 고루한 생각일 뿐이다. 

그 이른 바 ‘농담이나 매끄럽고 꺼칠(濃淡滑澁)’하다는 것은 먹 쓰는 법에서나 논 할 뿐인데 어찌 그 쓰는 법의 언필이냐 아니냐에 있을 수 있겠는가. 
묵법과 필법의 혼륜됨을 구별하지 않고서 다만 붓 쓰는 법으로만 꿰어 맞추고 있으니 어찌 편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개탄할 일이다. 


澄心-오대 남당 후주가 자신의 서재인 징심당에서 만든 종이 이름. 곱고 얇으며 광택이 있어 당시 최고품의 종이였다고 함.
玉板-옥판선지, 안휘성 동성(桐城)에서 만들어내던 고급종이.
宣牋-즉 화선지를 이름. 안휘성 선성현에서 산출하던 고급 서화지.
左白-후한의 東萊인. 자는 子邑. 종이를 잘 만들어 이름이 毛弘과 함께 높았다 함. 채륜의 종이보다 나았다 함.
東人-조선 사람.
韋中將-후한 때의 서가(書家).
張芝-초성이라 일컫는 인물. 장지[張芝-?~192] 중국 후한(後漢)의 서가(書家). 장초(章草:草書의 한 가지)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고 일컬어졌다. 속세를 피하여 오로지 서도를 벗 삼았으며,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쓰고서는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마침내 연못의 물이 먹물로 까맣게 변하였다는 ‘임지(臨池)의 기(技)’라 하는 표현이 전한다. 그러나 그의 진적(眞跡)으로 지목할 만한 확실한 유묵(遺墨)은 없다.
자는 백영(伯英). 감숙성[甘肅省] 출생. 두도(杜度) ·최원(崔瑗)의 서법을 배웠으며, 장초(章草:草書의 한 가지)에 뛰어나 초성(草聖)이라고 일컬어졌다. 속세를 피하여 오로지 서도를 벗 삼았으며, 베가 있으면 거기에 글씨를 썼고, 연못가의 작은 돌에도 글씨를 쓰고서는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마침내 연못의 물이 먹물로 까맣게 변하였다고 한다. 후세에 서도를 배우는 것을 ‘임지(臨池)의 기(技)’라고 이르게 된 것은 이에 연유한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도 장지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하나, 그의 진적(眞跡)으로 지목할 만한 확실한 유묵(遺墨)은 없다. 
濃淡滑澁-농 하고 담하거나 매끄럽고 꺼칠함. 
李廷珪-남당(南唐)의 묵공(墨工).
半丸-반 토막이라는 표현.
麗末-고려 말.
偃筆-붓을 뉘이어 쓰는 것.
偏固-편벽되고 고루 함. 

書圓嶠筆訣後(서원교필결후)


書圓嶠筆訣後(서원교필결후)

원문
圓嶠筆訣云 吾東麗末來 皆偃筆書 劃之上與左 毫銳所抹 故墨濃而滑 下與右 毫腰所經 故墨淡而澁 劃皆偏枯而不完. 

원교필결에 이르기를 우리 동쪽나라는 고려 말 이래로 모두 언필로 써서 획의 위와 왼쪽은 북 끝이 지나는 곳이므로 먹빛이 진하고 매끈하여 획의 아래와 오른쪽은 붓 허리가 지나가게 되는 까닭에 먹빛이 엷고 거칠게 되어 획이 모두 치우치고 메말라서 완전치 못 하다 라고 하였다.


圓嶠-이광사(李匡師)
圓嶠筆訣-원교 이광사가 쓴 서예 이론서.
吾東麗末-우리나라 고려 말.
濃而滑-먹의 성질이 농하고 매끄러움.
淡而澁-먹이 담박하고 껄끄러움.
偏枯-먹이 거칠고 메마름.

其說四破一橫劃 似剖細析微 而最不成說. 上但有左而無右 下但有右而無左歟. 毫銳所抹 不及於下 毫腰所經 不及於上歟. 橫劃旣如是 竪劃又如何 濃淡滑澁 是在用墨之法 不可責之 於用筆之偃與直也. 

그 이야기는 하나의 횡획을 네 가지로 나뉘어 말 하므로 자세히 분석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위는 다만 왼쪽만 있고 오른쪽이 없으며 아래도 다만 오른쪽만 있고 왼쪽이 없다는 말인가. 
붓끝이 지나는 바로는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횡획이 이미 이와 같다면 수획(竪劃)은 어떠하겠는가. 
진하고 엷고 매끄럽고 거친 것이 이것이 먹 쓰는 법에 있는 것이니 붓을 뉘어 쓰느냐 곧게 쓰느냐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탓 할 수 없다

書家有筆法 又有墨法 而筆訣中 無一影響於墨法者 盖但論筆法 已是偏枯 且論筆法 而不分於墨與筆 囫圇說去 無所區別 不知爲何者始墨 何者是筆 是可成說乎. 

글씨 쓰는 사람들에게 붓 쓰는 법이 있고 먹 쓰는 법이 있는데 원교의 필결 속에는 먹 쓰는 법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다만 붓 쓰는 법만 논하였으니 이것은 치우치고 메마른 일이다. 

또 붓 쓰는 법을 논하였지만 먹과 붓을 나뉘지 않고 뭉뚱그려 말 하고 마니 구별할 수 없으며 어느 것이 먹이 되고 어느 이 붓 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가히 말이 성립되는 일인가. 

見圓嶠書 非懸腕. 凡書字 懸腕與不懸腕 無以循影於字劃之間 何可誣也. 親授於圓嶠之諸人 亦皆不知懸腕法 筆訣中 所以不及懸腕一字也. 懸腕然後 可以言用筆 不懸腕 何以言用筆之偃與直 其深責偃筆. 亦不知其謂何也. 

원교의 글씨를 보면 팔꿈치를 들고 쓰지 않았다. 현완으로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글자의 획 사이에서 흔적을 없앨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꾸밀 수 있는 일인가.

원교에게서 직접 배운 여러 사람들도 역시 모두 현완으로 쓰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 필결 중에서도 그런 까닭으로 현완으로 글자를 쓴다는 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현완으로 쓴 연후에라야 가히 붓 쓰는 법을 말 할 수 있는 것인데 현완으로 쓰지도 못 하면서 어떻게 언필이니 직필이니를 논할 수 있으며 언필로 쓰는 것을 깊이 탓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무엇을 이르는 말인지 모르겠다

麗末來 至於國初 如李(李君侅),孔(孔俯),姜(姜希顔),成(成達生) 諸名公 無不龍騰鳳翥 何嘗有一波一點之偃筆. 且與崇禮門 興仁之門 弘化門 大成殿扁額 豈偃筆所可書者也. 其所云偃筆 未知指何人書也. 且如其劃 伸毫下之 利刀橫削者 恐又不成說. 若令伸毫 如利刀橫削 當另製一種筆 如畵工匾筆 糊匠糊箒樣子 然後可以中法 以今通行之棗心筆 無以下手矣. 其又云堅築筆者 是古今書家所未聞之訣也.

고려 말 이래로 조선 건국 초에 이르기 까지 이군해,공부,강희안,성달생과 같은 여러 이름난 분들은 용이 오르고 봉황이 나는 듯 한 글씨를 못 쓰는 일이 없었거늘 어찌 일찍이 한 삐침이나 한 점획에 언필이 있었겠는가.

또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홍화문 대성전의 편액과 같은 것들이 어찌 언필로 쓸 수 있는 것들이겠는가. 그 이른바 언필이라 하는 것은 어느 사람의 글씨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획을 만드는데 붓을 펴대고 날카로운 칼로 가로 끊듯 한다’하는 것은 아마 또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붓을 펴서 날카로운 칼로 가로 끊듯 하려면 따로 화공의 납작붓(匾筆)이나 귀얄 모양 같은 일종의 특별한 붓을 만든 연후라야 그런 법에 맞출 수 있을 터이니 지금 통행하는 대추씨 모양의 붓(棗心筆)으로는 손댈 수 없을 것이다. 
또 이르기를 ‘측필을 굳게 해야 한다’고 말 하였는데 이는 옛날이나 지금의 글씨 쓰는 사람들이 아직 듣지도 못하던 비결이다.

 

築筆者 必於連點處 緊接之義 如冫是也. 非橫直戈波諸劃 所可施之也. 至於筆先手後者 尤不可以示後者也. 書거所先 在於懸腕懸臂 乃至於一身之盡力 今云筆先手後 又云盡一身而送之 筆旣先矣 何庸更藉於手與身也. 先後矛盾 自亂其例 轉沒巴鼻 寧不可歎也.

點法云形雖尖 毫皆伸者 又何說乎. 欲以伸毫一法 偏施於戈波點劃 而最不合於點法 故作此牽强之說. 夫尖者 聚而合之者也 伸者散而放之者也 尖不可以爲伸也 伸不可以爲尖也.

축필(築筆)이라는 것은 반듯이 점을 연결하는 것에서 그것을 굳게 접합시켰다는 의미로 冫와 같은 것이 이것이니 가로 세로 戈획 파책 같은 여러 획에는 그것을 베풀 수 없는 것이다.

‘붓이 앞서고 손이 뒤 따른다’는 것에 이르면 더욱 뒷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글씨 쓰는 사람이 앞서 할 것은 팔꿈치를 들고 쓰는 것과 어깨를 들고 쓰는(현비)것이고 이에서 일신의 모든 힘으로 쓰는 것이어늘 이제 말하기를 ‘붓이 앞서고 팔이 뒤 따른다’하고 또 말하기를 ‘일신이 힘을 다하여 그것에 보낸다’ 하였으나 붓이 이미 앞섰는데 어떻게 손과 몸에 다시 바탕을 두겠는가. 
선후가 모순되어 스스로 그 순서를 어지럽히니 도리어 그 요령을 잃게 되었다. 어찌 한탄치 않으랴.

점 찍는 법에 이르기를 ‘형태는 비록 뾰족하나 붓털을 모두 펴는 것’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말 인가.
 신호(伸毫)는 한 법으로써 과(戈)획이나 파(波)획 점획에 두루 베풀고자 한다면 가장 점법에 합당치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은 것은 억지로 끌어낸 이야기다. 대체로 뾰족하다는 것(尖)은 모아 합친 것이고 편다는 것(伸)은 뾰족해 질수가 없는 표현이다.
 즉 첨(尖)과 신(伸)은 다른 형체이어서 서로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붓을 펴서 뾰족한 형상으로 만들 수 있단 말 인가.

結構者 筆陣圖 以爲謀略也. 雖刀甲精利 城池堅完 非謀略 無以施措. 所以書家最重結構.自鍾索以下 至於近日中國書家 有一定不敢易之結構法 如左短下齊 右短下齊之類 不可枚擧. 
今所云結構者 全無着落 古人相傳之諦妙訣 一無相及 盖其書於結構一法 尤以臆見 向壁虛造 醜惡不可狀 反乃以歐顔爲方板一律 至以謂悉蹈右軍 不是書之科.

此何異於武叔毁聖 波旬謗佛也 此尤先闢者也.

결구라는 것은 ‘필진도’에서 모략(謀略)이라 하였다. 비록 칼과 갑옷이 뽑은 듯 날카로우며 성지(城池)가 귿세고 완전하다 해도 모(謀)와 략(略)이 없다면 베풀어 놓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서가는 결구를 가장 중시하였다.

그래서 종요와 삭정이하로 요즘의 중국서가에 이르기 까지 한가지로 정해져서 감히 바꾸지 못 하는 결구법이 있으니 왼쪽을 짧게 하고 위를 가지런히 한다든지 오른쪽을 짧게 하고 아래를 가지런히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일일이 들 수도 없다. 이제 이른바 결구라는 것은 전혀 근거를 잃어서 옛 사람들이 서로 전해주던 진체(眞諦)와 묘결(妙缺)에는 하나도 서로 미치지 못 하였다. 

그래서 대개 그 결구라는 한 가지 법칙에 대한 글은 더욱 억견(臆見)으로써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벽 쪽을 향함) 꾸며 만든 것으로 추악하기가 형용할 수 없는데 도리어 이에 구양순과 안진경이 방판(모가 난 형태)으로 한 가지 법칙을 삼은 것으로써 ‘우군(왕희지)의 글씨를 모두 섭렵해 보았으나 이런 글씨의 밑(科)은 없었다’고 말 하기에 이르렀다
. 이 어찌 무숙이 성인을 헐뜯는 것이나 파순이 불타를 비방하는 것과 다르다 하겠는가. 이는 더욱 먼저 피해야 할 일이다.

詳準於右軍諸帖 可知吾言之有本者 未知指右軍何帖也. 其云 東人固陋 不知巧据者 秪是筆陳圖之不能辨 至於右軍諸帖 果皆可無巧据者 而直證以吾言有本耶. 嘗試論之 樂毅論 已自唐時難得眞撫本 黃庭經 非右軍書 東方讚 曹娥碑 未知其出於何本 書家之具眼者 直以爲有識者 所不應道 淳化諸帖 眞?混淆 轉傳翻訛 最不可爲準. 況右軍從失郡告靈以後 略不復自書 有代書一人 世不能別 見其緩異 呼爲末年書. 外此又有右軍何帖 證以吾言之有本耶.

‘자세히 우군의 여러 서첩을 맞추어 보면 내 말이 근본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우군의 어느 서첩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거기서 말 하기를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루해서 고증 하는 것도 모르고 단지 필진도 조차 변별 할 줄 모르므로 우군의 여러 서첩도 과연 모두 다 고증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니 내 밀에 근본이 있다는 것을 곧장 증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것을 논(論)하여 보았듯이 악의론은 이미 당나라 때부터 진본조차 구하기 힘들었고 황정경은 우군의 글씨가 아니며 유교경(遺敎經)은 당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고 동방찬, 조아비는 그것이 어느 본(本)에서 나왔는지 조차 모르니 서가의 안목이 갖춰진 사람은 금새 다 알고 있으나 말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순화의 여러 법첩은 진본과 가본이 뒤 섞이었고 옮겨 새겨지면서 틀리게 되어 가장 기준을 삼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우군이 군(郡)의 벼슬을 잃고 부모의 영전에 맹세 한 후에는 대략 다시 스스로 글씨를 쓰지 않고 대신 쓰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하는데 세상이 능히 구별치 못 하고 그 느리고 다른 것을 보고 말년의 글씨라 불렀다’고 함에 이르러서랴. 
그러니 이것밖에 또 우군의 무슨 서첩이 있어서‘내 말이 근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는가

其品第 漢隸以禮器碑爲最 以郭碑爲出 後世可稱具眼 忽以受禪竝擧於禮器 志以孔龢孔宙衡方諸碑 皆不及受禪 不知其何據也. 漢隸雖桓靈末造 與魏隸大不同 有若界限 受禪卽魏隸也. 純取方整 已開唐隸之漸 豈可與禮器竝稱 反居公龢孔宙之上也. 若知若不知 殊不可測度耳. 

噫 世皆震耀於圓嶠筆名 又其上左下右 伸毫筆先諸說 奉以金科玉條 一入其迷誤之中 不可破惑 不揆讒佞 大聲疾呼 極言不諱如是. 

그 품제(品第)에 대해서는 ‘한의 예서는 예기비를 최고로 삼고 곽비(郭碑)로 끝이 나는데 후세의 안목을 갖추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홀연 수선비(受禪碑)로서 예기비에 아울러 듣게 되니 공화 공주비, 형방비의 여러 비들로써는 수선비에 미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그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한예는 비록 환제(桓帝)나 영제(靈帝-147~188)때와 같은 말기에 만들어졌다 해도 위예(魏隸)와는 크게 같지 않아서 한계를 그어 넣은 듯한 것이 있다. 그런데 수선비는 곧 위예(魏隸)이다. 
그래서 순전히 네모반듯한 것을 취하여 이미 당예(唐隸-해서)의 발단(發端)을 열고 있는데 어찌 가히 예기비와 같이 일컬을 수 있겠으며 도리어 공화 공주비의 위에 둘 수 있겠는가. 
알고 모르는 것은 그 서로 다름이 헤아릴 수도 없이 클 뿐이다.

아, 세상은 모두 원교의 필명으로 울리고 빛나서 또 그 상좌(上左), 하우(下右)나 신호(伸毫), 필선(筆先)과 같은 여러 이야기들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한결같이 그 그릇된 속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니 미혹을 깨뜨릴 수 없으며 거짓되고 망녕스러움을 헤아릴 수 없어서 크게 떠들어대고 거침없이 극단으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구나.

然此豈圓嶠之過也. 其天品超異 有其才而無其學. 無其學 又非其過也. 不得見古今法書先本 又不得就正大方之家 但以天品之初異 騁其貢高之傲見 不知裁量 此書季以來 所不能免也.

其三致意於不學古 而緣情棄道者 殆似自道也 若似得見善本 又就有道 以其天品 豈局於是而已也.

그러나 이것이 어찌 원교의 잘못이겠는가.
 그 천품은 남보다 뛰어났으나 그는 재주만 있고 배움이 없었다. 

그 배움 없었던 것도 또한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고금 법서의 좋은 것을 볼수 없었고 또 옳은 법을 알고 있는 대가에게 나아가 배울 수 없었으니 다만 천품이 뛰어난 것으로써 그 드높은 오견(傲見)을 치달아 재량할 줄 몰랐었는데 이것이 근세이래로 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세 번 옛것을 배우지 않는데 뜻을 두고 정(情)에 따라서 정도(正道)를 버린 사람은 거의 자기의 도를 정도와 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만약 선본(善本)을 볼 수 있게 하고 또 정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면 그 천품으로서 어찌 여기에 국한 하였을 뿐이겠는가.


懸腕-팔을 팔꿈치에 괴지 않고 허공에 띄워 쓰는 필법.
懸腕懸臂-팔과 팔꿈치를 괴지 않고 허공에 띄워 쓰는 필법. 
筆陣圖-진(晉)의 위부인(衛夫人)의 필진도(筆陣圖).
鍾索-종요와 삭정.
方板一모가난 형세.
武叔-주돈이[周敦頤-1017~1073]의 자(字)이다. 송나라의 유학자.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호는 염계(濂溪). 도주(道州: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樂毅論-전국시대의 연나라 장군 악의(樂毅)에 대한 인물론으로서 위나라 하후현(夏後玄)의 작. 동진(東晉)의 왕희지가 쓴 것으로 전하여 진다.
黃庭經-중국 위(魏)·진(晉) 시대에 구성된 초기 도교의 경전(經典)으로 칠언운문(七言韻文)으로 쓰였다.
 <황정내경옥경(黃庭內景玉經)>, <황정외경옥경(黃庭外景玉經)>, <황정중경옥경(黃庭中景玉經)>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외경’은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베껴서 거위와 바꾸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내경’은 위부인(魏夫人) 또는 남악부인(南岳夫人)으로 불리는 위화존(魏華存, 252~334)이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정경>은 양생(養生)과 수련(修練)의 원리를 담고 있어 <도덕경(道德經)>,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와 함께 선도(仙道) 수련의 주요 경전으로 여겨졌으며, 도가의 인체론을 바탕으로 양생의 구체적인 방법을 서술하고 있어서 도교의 수련 요결로 중시되었다.

瘞鶴銘跋(예학명발)

瘞鶴銘跋(예학명발)
원문
此是五段眞拓 尙非全本 似以標翦殘闕矣. 原石自左而右 今無以見本來面目. 然麟角一株 亦可寶也. 東來絶罕 凡三見 而尹氏舊本最古 外此通行玉煙堂 僞本耳.

이것은 다섯 단으로 된 진본 탁본이다. 비록 완전한 본은 아니지만 오려붙인 본으로써 떨어지고 남은 것 인 듯하다. 
원석은 왼쪽으로부터 오른쪽까지 이제는 본래 면목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기린의 뿔은 한 그루이지만 역시 보배라 할 수 있다. 
동쪽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매우 드물어서 무릇 세 번을 보았지만 윤씨의 구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이 외에 돌아다니는 옥연당본이라는 것은 위본일 뿐이다.


瘞鶴銘-예학명은 양나라 사람으로 호가 화양진일(華陽眞逸)이라 하는 도홍경(陶弘景)이 글을 짓고 상황산초(上皇山焦)라는 은사가 글을 썼음. 강소성 단도현 초산(丹徒縣 焦山) 비탈 석상에 있었음. 
뒤에 강물 속에 떨어진 것을 송 순희 연간에 건져냈는데 후에 다시 강물 속으로 떨어져 청의 강희제 연간에 진붕년(陳鵬年)이 인부를 모집하여 꺼냈다. 모두 다섯 조각. 

題歐書化度寺碑帖後(제구서화도사비첩후)

題歐書化度寺碑帖後(제구서화도사비첩후)
원문
歐碑今海內見存爲七 此其一也 但原石已秩 此本爲翁覃磎老人 合校宋拓諸本 摹刻於濟寧學院者也. 嘗見成親王 所臨一本 比此本 殘字多少 不一. 成親王所臨 卽南海吳氏本也. 此本 合校時 似未及並收矣. 歐法易於方勁 此本最得圓神 非老人深於歐法 無以有此 尤可寶重也. 東人最重歐法 自羅代至於麗中葉 皆恪遵渤海遺式矣.

구양순이 쓴 비문으로 지금까지 중국안에 남아있는 것은 일곱이 되는데 이것은 그 중의 하나이다. 다만 원석은 이미 잃어버렸으나 
이본은 옹담계 노인이 송나라 때 탁본한 여러 본들을 합쳐 비교하여 제녕학원에서 본떠 새긴 것이다. 
일찍이 성친왕(永瑆)이 임모한 일본(一本)으로 이본과 비교하여 보았었는데 남은 글자가 다소 일치하지 않았었다.

성친왕이 임모한 것은 곧 남해 오씨 본이다. 이본이 합쳐 비교될 때에 아마 아울러 수록되지 못 하였던 것 같다. 
구양순의 서법은 가장 모나고 굳세기 쉬운데 이본은 가장 원숙한 신비로움을 얻고 있다. 
담계 노인이 구양순 서법에 깊지 않다면 이것이 있을 수 없으니 더욱 보배롭고 소중하다고 볼 수 있다.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구양순 서법을 귀중히 여겨 신라시대로부터 고려 중엽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각별히 구양발해의 남긴 서법을 지키었다.

麗末曁本朝初 專習宋雪 轉失書家舊法 不知歐書之爲何樣. 其後又高自標致 乃家家晉體 戶戶鐘王 童而習之者 皆樂毅論 黃庭經 遺敎經 外是 輒卑而不顧 未知其所習樂毅 黃庭 遺敎 竟是何本也. 樂毅眞本 已自當代難得 黃庭非右軍書 如遺敎卽唐是經生書也. 

是以趙子固云 入道於楷,董化度,九成,廟堂三碑. 趙之距今 已六七百年矣. 六七百年之前 菫以此三碑爲楷法章程 子固豈不知有樂毅 黃庭 如是立說也. 樂毅諸法書 訛失難據 惟此三碑 尙存原石 可以溯源晉人. 此由唐入晉之正軌 舍是無適也.

고려 말 우리왕조 초기 이래로 오로지 송설체(조맹부의 서체)를 익혀서 도리어 서가(書家)의 올바른 예법을 잃어버렸으니 구양순 글씨가 어떤 모양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 후에 또 각자가 드높게 표치를 드러내게 되자 이에 집집마다 진체(晉體)이고 간곳 마다 종요와 왕희지였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익히는 것은 모두 악의론 황정경 유교경(遺敎經)이 마침내 어떤 본인가는 알지 못 하였었다. 
악의론의 진본은 이미 당대로부터 얻기 어려웠고 황정경은 왕우군의 글씨가 아니며 유교경과 같은 것은 곧 당나라 때 경생(經生)이 쓴 것이었다. 

이로써 조자고(조맹견)가 이르기를 해서로 들어가는 데는 오직 화도.구성. 묘당 세비가 있다고 하였다. 
조씨로 부터 지금까지 이미 육칠백년이 지났다. 
육칠백년 전에도 다만 이 세비로 해법의 장정(章程)을 삼았는데 조자고가 어찌 악의론이나 황정경이 있는 것을 몰라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하였겠는가.

 악의론등 여러 법서는 잘못 전해지고 본 면목을 잃어버려서 근거하기 어려웠으나 오직 이 세비는 아직 원석이 남아있어서 가히 진인(晉人-왕희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으로 말미암아서 진으로 들어가는 올바른 길이었으니 이를 버리고는 갈 데가 없었다. 

 

近又東人一書家 拈出萬毫齊力一語 迷誤諸人 不講懸腕 不講?壓鉤揭 不講九宮架間 以此萬毫齊力一語 欲了書法 多見其不知量也. 旣염(扌+占)萬毫齊力一語 又何不更염(扌+占)其上句之槳深色膿也. 不覺放筆一笑.

요사이 또 우리 동쪽나라사람인 한 서예가가 ‘모든 붓털에 힘을 모두가게 한다’(萬毫齊力)는 한 마디 말을 끄집어내어서 여러 사람을 그르쳤다. 글씨를 쓰는데 있어서 팔꿈치를 들고 쓰는 법도 말해주지 않고 붓을 잡는데 불끈 쥐고(압) 누루고(壓) 걸어 당기고(鉤) 치받치고(揭)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결구하는데 있어서의 구궁법과 간가(間架)의 법도 말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붓털에 힘을 모두가게 한다’는 한 마디 말로써 글씨 쓰는 법을 다 끝마쳐 버리려 하였으니 그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이미 모든 붓털에 힘을 모두가게 한다는 한 마디 말을 끄집어내었으면 또 어찌 다시 그 윗 구절인 ‘먹물이 많고 빛이 짙다’는 말을 끄집어내지 않았는가. 나는 모르게 붓을 놓고 한바탕 웃었다. 


翁覃磎-옹방강. 담계는 그의 호다.
宋拓-송나라 대(代)의 탁본.
成親王-청조중기~후기의 황족, 서가. 건륭제의 제11자. 명은 수성, 자는 경천, 호는 소엄, 즉제, 시호는 철. 건륭54년(1789) 성친왕에 봉해지고, 영시위대신이 됨. 건륭제의 학무 자질을 승계해서 조정의 예의전고에 밝음. 서는 첩학파 계통에 속하고 조맹부, 동기창의 수윤한 해서, 행서도 뛰어남. 역대의 명적을 임모한 『이진제모고첩』이 전함.
歐法-구양순의 서법.
羅代-신라시대.
麗中葉-고려 중엽. 
渤海遺式-구양발해의 남긴 서법.
宋雪-조맹부의 호.
鐘王-종요와 왕희지. 
樂毅論-왕희지가 쓴 악의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 소해서로 쓰여짐. 
黃庭經-도가의 기록인 황정경을 역시 왕희지가 쓴 것으로 노파의 거위와 맞 바꿔 써 주었다는 일화가 있음.
趙子固-조맹견.
化度,九成,廟堂三碑-화도사비, 구성궁비, 공자묘당비. 
東人-우리나라를 이르는 말.
萬毫齊力-모든 붓털에 힘을 모두가게 한다
懸腕-팔꿈치를 들고 쓰는 법 
九宮架間-구궁법과 간가(間架)의 법
槳深色膿-먹물이 많고 빛이 짙다

題元王叔明書後(제원왕숙명서후)

題元王叔明書後(제원왕숙명서후)

원문
黃鶴山人以畵聞 而書法之妙 亦不在畵下. 有歐褚神髓 又有大令十三行規度 此眞入晉唐奧區者也.

東人所謂晉體 可謂無佛處稱尊 卽皆天然外道耳. 盖知歐褚之 爲山陰蹊徑 不於此而入者 多其見不知量也.

황학산인(王蒙)은 그림으로 소문나 있으나 절묘한 것도 또한 그림의 아래에 들지 않는다. 
구양순 저수량의 신수가 있고 대령(왕희지)의 십삼행 법식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진나라와 당나라의 깊은 경지에 까지 들어간 것이다. 

동쪽 나라 사람들이 소위 진체(晉體)라 하는것은 부처가 없는 곳에서 세존을 일컬는다 말 할 수 있으니 곧 천연외도(天然外道-불타의 정법이 있는 줄을 몰라서 다른 것을 신봉하는 사람 내지는 집단)일 뿐이다. 
대개 구양순과 저수량이 산음으로 가는 길인 것을 알아야 하니 이곳으로 해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그 헤아릴 줄도 모르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黃鶴山人-왕몽(王蒙),1308(원 지대 1)~1385(명 홍무 18)대의 인물. 원대의 화가. 원말 4대가의 한 사람. 자는 숙명(叔明), 호는 황학산초(黃鶴山樵), 향광거사. 호주(저장성 오흥) 사람, 조맹부의 외손인 도종의와는 종형제 사이. 원나라 말 이문(理門)의 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황학산(저장성 항주 북동)에 은둔했다. 홍무(1368~98)초 명조를 섬겨 태안(산둥성)의 지주(知州)가 되나 홍무 13년(1382) 호유용의 사옥에 휘말려 옥사했다. 동원, 거연, 왕유에게 산수화를 배웠고 외조부인 조맹부의 화풍을 이어받았다 한다.

天然外道-불타의 정법이 있는 줄을 몰라서 다른 것을 신봉하는 사람 내지는 집단. 

書訣(서결)
원문
 書之爲道 虛運也. 若天然 天有南北極 以爲之樞 紐繫於其所不動者 而後能雲其所常動之天. 是故書成於筆 筆運於指 指運於腕 腕運於肘 肘運於臂. 臂也 肘也 腕也 指也 皆運於其右體者也. 右體則運於其左體 左右體者 體之運於上者也. 而上體則運於其下體 下體者兩足也. 兩足著地 拇踵下鉤 如屐之有齒 以刻於地者 然此之謂下體之實也. 下體實矣. 而後能運上體之虛. 然上體亦有其實焉者 實其左體也. 左體凝然據几 與下貳相屬焉. 由是以三體之實 而運右一體之虛 而於是右一體者 乃其至實夫. 
 글씨가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은 텅 비게 하여 움직여 가는 것이다. 마치 하늘과 같으니 하늘은 남북극이 있으니 그것으로 축을 삼아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잡아매고 그런 뒤에 능히 그 항상 움직이는 하늘을 움직여 가게 할 수 있다. 글씨가 법도로 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  쓰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에서 움직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며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며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진다. 

그리고 어깨니 팔뚝이니 손목이니 손가락이니 하는것은 모두 그 오른 쪽 몸뚱이라는 것에서 움직여진다. 또한 오른 쪽 몸뚱이는 곧 그 왼쪽 몸뚱이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웃 몸뚱이는 곧 하체에서 움직여지는데 하체라는 것은 두 다리이다. 
두 다리가 땅을 딛는데 발가락과 뒷꿈치가 아래를 걸어 당기어 나막신 굽이 땅에 박히는 것처럼 하면 그러면 이것은 하체가 충실하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체가 충실해져야만 그 이후에 능히 상체의 텅 빈 것을 움직여 갈 수 있다. 그러나 상체도 역시 그 충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상체를 충실히 해야 한다. 
상체는 엉겨 붙듯이 책상에 기대서 아래와 거듭 서로 이어져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삼체(三體)가 충실해지면 오른쪽 한 체(體)의 빈 것을 움직여 나아갈 수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 한 체라는 것은 지극히 충실해지게 된다. 
 然後肩運肘 由肘而腕而指 皆各以至實 而運至虛. 虛者其形也 實者其精也 其精也者 三體之實之 所融結於至虛中者也. 惟其實也 故力透乎紙 其虛也 故精淨乎紙. 
 그런 뒤에 어깨로써 팔뚝을 움직여 나가고 팔뚝으로 말미암아 손목을 움직여 나가며 손목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나가는데 모두 각각 지극히 충실함으로써 지극히 텅 빈 것을 움직여 나가게 된다.
 비었다는 것은 그 형태이고 충실하다는 것은 그 정기다. 그 정기라는 것은 삼체의 충실한 것이 지극히 빈 가운데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다. 
오직 그 충실한 까닭으로 힘이 종이를 뚫고 그 빈 까닭으로 정기가 종이에 맑게 배어나온다. 
 點劃者 生於手者也. 手挽之向於身 點畫之屬乎陰者也. 手推之而摩諸外 點畫之屬乎陽者也. 一推一挽 手之能爲點劃者 如是 舍是則非所能也. 是故陰之畫四 側也努也掠也啄也 皆右旋之 運於東南者也. 陽之畫四 勒也趯也策也磔也 亦左旋之 運於東南者也. 吾之手生於身之西北 故能券舒於東南 若運於西北 弗能也. 强而行之 縱譎怪橫生 君子不由也.

 점획이라는 것은 손에서 생기는 것이다. 손이 그것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면 점획은 음에 속하는 것이고 손이 그것을 밀어내어 밖으로 내치면 점획은 양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 번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것으로 손이 능히 점획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은데 이를 버리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음의 획 넷인 측, 노, 략, 탁은 모두 오른 쪽으로 돌려서 동남쪽으로 움직여 나간 것이며 양의 획 넷인 늑, 적, 책, 책은 역시 왼쪽으로 돌려서 동남쪽으로 움직여 나간 것이다. 

우리 팔이 몸의 서북쪽에서 나 있는 까닭으로 능히 동남쪽으로 말고 펼 수(券舒) 있는 것이니 만약 서북쪽으로 움직여 나간다면 될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해서 비록 엉터리로 괴상하게 마구 만들 수는 있겠지만 군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書古東尙書所藏覃溪正書簇(서고동상서소장담계정서족)

書古東尙書所藏覃溪正書簇(서고동상서소장담계정서족)

원문
覃溪老人正書 於率更得其圓處 於河南得其隸意 而八萬卷金石之氣 注於腕下 蔚然爲書家龍象. 由唐入晉之徑路 舍是無二 石庵差可比擬 成親王以下皆遜一籌. 古東先生 以爲近日書法之第一 是天下正論. 今因古東先生命 題之如此.

담계 노인의 정서(해서)는 솔경(구양순)에게서 그 원숙한 것을 얻었고 하남(저수량)에게서 그 예서 필의를 얻었는데 팔만권의 금석 기운이 팔뚝 아래로 쏟아져 내려서 뚜렷하게 서가의 용상(불가에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대덕을 일컬는 말)이 되었다.

 당을 거쳐서 진으로 들어가는 경로는 이를 버리면 둘도 었으니 석암이 거의 비슷하고 성친왕 이하는 모두 한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고동선생이 요즈음 서법의 제일이라 하는것은 천하의 정론이다. 지금 고동선생의 명에 인연해서 이같이 제하노라.

古東-李翊會(1767~?)의 호. 순조 11년에 문과 출신으로 영의정이되고 경사에 박통하였고 시서에 능했으며 수장(收藏)이 많아 예원(藝苑)의 추앙을 받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 옹방강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주
覃溪老人-옹방강.
正書-해서.
率更-구양순.
河南-저수량.
龍象-불가에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대덕을 일컬는 말.